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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 퇴직을 하므로 조직생활에서 완전 해방되였고 다시 어떤 명목으로도 억메이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할것
    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조직이라기 보다 情에 인간관계에 억메여 싫어 하는 것도 과감히
    싫타 말할수 없고 말해도 거부할수 없게 만드는 끈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 머리를 좀 식히고 싶고 
    명분은 내자의 환갑맞이. 못찾아준 생일 선물 쯤으로 치부하고 또 반세기 전 수학여행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 경주로 가기로 하고  지리를 잘모르니 네비게이션을 경주 박물관으로 맞추어 떠난다  
    ▼ 박물관은 유물의 정수가 모여 있는 곳으로 한눈에 볼수 있도록 최적화 되어 있는 곳으로 많이들 찾는다
     우리도 우선 신라의 정수를 보려 박물관 부터 들립니다 박물관은 무료 입장 이군요 
     그 옛날의 박물관이 아니고 확장 이전된 것 같습니다 상당히 넓군요 전시관만 하더라도 4개동 야외 유물도
     다수 전시 되어 있고 수학여행인지 초등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란이 박물관임을 실감나게 합니다

     
   ▼ 승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 화단에도 유물이 전시되고 잎파리가 책에서 나 본듯한 나무가 있군요 
     이것도 전시물인가 희귀한 것 같아 한번 올려 봤습니다 

     
   ▼ 종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종각이 보이고 그곳으로 갑니다  아 !  이것이 회자되던 
     에밀레 종이군요 크긴 크군요 종은 받침에 올려져 있어 실제로는 치지 않은 모양입니다 종소리는 
     미리 녹음되어 있는 스피크에서 울려 나옵니다  이종에는 두군데 글이 세겨져 있는데 한면에는 이종을
     만들게 되기 까지 기록인 산문이 있고 그 반대면에는 네글자씩오십줄로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사람
     종을 만든 사람등이 세겨져 있고 산문은 성덕대왕신종지명 (聖德大王神鐘之銘) 으로 있어 이로써
     이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임을 알수 있고 그다음의 내용을 요약하면 신라경덕왕景德王 (재위742~
     765) 이 선대왕인 성덕왕聖德王(재위702~737) 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그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 하자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재위765~780) 이 즉위 7년 만인 신해년
     12월 14일 종을 완성 하였다고 합니다  우린 봉덕사 종 또는 에밀레종의 전설이 먼저 생각 나게 합니다 

     
   ▼ 박물관 고고관 앞 마당에는 석가탑 다보탑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놓았군요 

     
   ▼ 신라는 불상과 돌탑의 나라 였는지 옛 그 영화를 봅니다 서라벌 반월성과 시가를 모형으로 봅니다
     구획이 요즘의 신시가를 보는듯 합니다 반월성이라 함은 성의 형태과 반월 같이 생겨 붙은 이름 같군요 

     
   ▼ 고고관으로 출토된 신라의 대표 유물을 보러 갑니다  화려 합니다 금관 금모 드리게 요대 등

 
  ▼ 박물관과 가까운 경주 임해전지로 
    갑니다 흔히들 안압지라는 곳 입니다
    주차장에 주차비는 없고 입장료 1000원.
    입니다 
    안압지는 신라문무왕 14년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3개의 섬과 북쪽 동쪽으로
    12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삼신산과 무산12봉을
    상징하는 신라 원지(苑池)의 대표적인
    것이라 합니다  
     
   ▼ 못가에 임해전과 여러 부속 건물을 만들어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하면서 나라의 경사 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때 이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며
     임해전에서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물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입수로 출수로와 못가의 호안석축의 
     정확한 길이 등이 밝혀져 원형대로 복원 하였다 합니다  

     
   ▼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 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 들어 안압지라 
     불리우게 되였다 하며 1975년 발굴조사 이전인 우리들의 수확여행시의 안압지는 거의 사진과 같은 이런
     모습이 였다고 생각 됩니다 
      (1950년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뒷산은 소금강산. 일제때 세운 임해정은1977년에 황성공원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호림정이다. ) 

 
 ▼ 안압지에서 대능원으로 갑니다 
  이곳은 대소 20여기의 삼국시대 신라고분이
  밀집되어 있어 이 고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한 사적공원이라 합니다
  직경10m 미만에서 120m 까지 높이1m 미만
  에서 23m 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적공원
  안의 고분들은 삼국시대 신라의 왕과 귀족들
  능묘로 추정되고 있으며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토분으로 되어 있으나 표형분고분이라고
  하는 부부합장용의 쌍분도 있고 내부구조는
  몇몇고분의 발굴결과 신라특유의 적석목곽분
  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미추왕능, 천마총, 쌍분인 황남대총
  등이 있고 발굴능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금.은
  장신구 마구 무기등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입증한 바 있다 함니다
  관람료는1500원 주차료2000원 
     
   ▼ 공원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조경이 아주 잘 되어 있고 소나무들이 옛날 보던 우리 소나무 같아 더욱
     정답게 다가 오고 오솔길은 연인과 같이 걷기 좋은 분위기 있고 운치 있는 길 입니다 

     
   ▼ 고분과 연륜이 어울리는 듯한 느티나무 한그루 눈길을 끌고 다람쥐는 우리들을 반기는 듯 합니다 

     
   ▼ 고분과 주변 경관이 어울리도록 잘 조성되어 있어 쉼터 연못 오솔길 등 다양하게 꾸며 놓았군요

     
   ▼ 과거 일제시대 그냥 방치된 고분들

     
   ▼ 제155호 고분이라고 불려왔으나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天馬)를 그린 말다래[障泥: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명명되었다.
    천마총(天馬塚)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서 봉토의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外護石]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
     [版築]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木槨]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운
     방식을 취하고 있다. 

     
   ▼ 천마도(국보 제207호), 금관(국보 제188호), 금모(국보 제189호) 등 11,297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 순백의 천마(天馬)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가 출토되였고 그 밖에 서조도(瑞鳥圖)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도 출토되었다. 현재는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 신라 미추왕능 입니다  신라13대 미추왕 (味鄒王 재위 262~ 284 ) 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능(竹現陵) ' 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최초 김씨
     왕이며 여러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 하였다 한다 높이 12.4m 지름 56.7m 로 둥굴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능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魂遊
     石) 이 있다 특이 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천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폐를 모신
     숭혜전 (崇惠殿) 이 있다 

     
   ▼ 솔숲의 오솔길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능원을 나와 첨성대 계림
     등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 반월성 부근의 능 경주는 눈에 보이는 것이 능과 탑과 불상이 아닌가 합니다

     
   ▼ 대능원을 거점으로 하여 도보로 첨성대, 계림, 반월성, 석빙고, 등을 돌아 볼수 있습니다 
     첨성대(瞻星臺) 는 신라 선덕여왕 (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 이고  신라시대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 이란 평가가 있음

     
   ▼ 첨성대 인근에 첨성대 모양의 꽃탑을 만들고 있군요 가을에 꽃 전시장을 만들 모양 입니다

     
   ▼ 계림 이숲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때 호공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나가 금궤를 내렸다
     뚜겅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구림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이라 부르게 되였다 경내에 있는 비는(비각) 조선 순조 3년에 세워진 것으로 김 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 계림을 나와 조금한 오르막을 오릅니다 이것이 월성 이군요 토성인데 높지 않고 막돌로 적당히 쌓아 
     있는 그런 성 성곽을 따라  순 우리소나무 제 멋에 겨워 멋대로 자라 저마다 자랑하고 있는 듯 합니다 

     
   ▼ 성내 부지 인듯 한 넓은 밭에는 경주시에서 모밀꽃 단지를 만들었군요  잘 자란 소나무 그늘에는
     관광객인지 경주시민인지 낮잠 한숨 멋들어지게 잡니다 

     
   ▼ 성을 따라 조금 가니 석빙고가 보입니다
     石氷庫 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이다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길이19m 너비6m 높이5.45m 석실(돌방) 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는데 약 1000 여개
     의 돌이 쓰였고 천정 외부는 봉토 형상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수 있게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석빙고 출입문 이밋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
     (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영조17년에 옮겨 세웠음을 알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부윤 조윤겸이 얼음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현재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에 옛터가 있다고 한다 그럼 석빙고는 신라 유물이 아닌가 봐?

 
 ▼ 오능은 경주시 탑동에 있고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등 
  신라 초기 네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왕의 
  왕후 알영 왕비의 능으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이 전하고 있다 
  오능에 대하여 또 다른 전설이 전하고 있는바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승천
  하였는데 그 7일뒤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
  졌고 이때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흩어진 유체를 모아 장사를 지내려 
  하였으나 큰 뱀이 나와 방해을 함으로 다섯
  유체를 각각 장사지내고 오능이라 하였으며
  또한 사능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오능의 관람료 주차료 각 1000 원 입니다  
     
   ▼ 오능 앞에 있는 숭의문 

     
   ▼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왕의 묘지 능의 내부 구조는 알수 없고 외형은 경주시내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시대 신라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토분으로 되어 있다  
     여기 잘 왔습니다 어머니도 박씨요 마누라도 "박" 며느리도 "박" 친구도 "박" 탁구친구도 "박" 박과 인연이
     많은데 안 왔으면 섭섭할뻔 했습니다 

     
   ▼ 보문호수 봄엔 벗꽃이 장관이라는데 초 여름엔 볼것이 없군요 불국사 가는 길목에 있어 들려 봅니다 

     
   ▼ 불국사 일주문 (정문) 입니다 
     정문주차장이나 후문(불이문)주차장을 이용하면 입장하기가 쉬운데 상가주차장은 조금 걸어서 올라 
     와야 합니다 걷기가 불편한분은 조금 곤란할 정도 관람료는 4000 원 절에서 관장하는 곳은 비싸게 
     받고 있군요 절도 너무 돈 을 많이 밝히는 것 같습니다  등산객에게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것 등 

 
 ▼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10년(751) 
   에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하여 개창
   되고 혜공왕(惠恭王) 10년(774)년에 완성
   되였다 
   선조(宣祖) 26년(1593) 임진왜란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웠고 1969~1973년 처음 
   건립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이땅에 세워 찬미하던 수도자들이 불도를 
   닦던 곳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 되였다     
     
   ▼ 불국사 상세도

     
   ▼ 일주문을 지나 길을 따라 덜어가면 멋진 반송이 보이고 연못이 나온다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잉어는 개의치 않고 먹이 활동을 한다 

     
   ▼ 해탈교를 지나 천왕문으로 갑니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금강역사가 수호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천왕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만물을 소생시키며 복락을 나누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 너른 광장 건너 노송사이로 사람들이모여 있고 얼핏하게 보입니다 불국사 건축물들이  

     
   ▼ 경내에 들어서니 석단과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석단위는 부처님의 전유 공간으로 불국토이고 석단 
     아래는 범부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동쪽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는 석단에 마련된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해서 오르고 자하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게 돤다는데 ...

     
   ▼ 1960년 초등학교 수학여행때의 자하문 아래에서 찍은 사진 뒷쪽 어디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을터인데... 
     사진 기술이 열악할때의 사진라라 그런가 그때의 얼굴을 기억할수가 없어 찾을수가 없습니다 
     그때 시절에는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석단을 통하여 여기에서 기념찰영이 가능 했는데 지금은 관람료을
     내고도 올라 갈수도 만질수도 없네요  

     
   ▼ 여행온분들 그늘에 자유롭게 않아 가이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보물 제1523호 경주 불국사석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의석조 형태인 직사각형
 으로, 네모서리와 장변의 중앙부에서는 안쪽
 으로 둥글게 모접기해 유려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이는 석조에 물을 채우면 연꽃이 피어
 오르는 듯한 모습을 구현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외부면의 돌림띠와 안상조식 및 내부면의 
 자방과 연화문 조식수법에 있어서도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여 신라인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예술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하는군요 . 
 수조를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토함산 약수를 
 받아 여행자의 목을 축일수 있게 물을 받아 
 놓아 일상생활에 쓰고 있습니다 
 석조 옆으로 비탈길로 대웅전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어 부처님 세계로 갑니다
     
   ▼ 경내에서 본 자하문의 안쪽 모양과 옆으로 붙어 있는 회랑 

     
   ▼ 그 유명한 석가탑(불국사 3층석탑)과 다보탑
     ※불국사 삼층석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
     (釋迦塔) 이라고도 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따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석가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높이 8.2미터이며,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으로 현재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그 외는 완전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다.
     순백(純白)의 화강암(花崗巖)으로 방형(方形)의 기단(基壇)과 사방에 계단과 난간(難竿)을 만들었다. 
     초층(初層)의 중앙과 4우(四隅)에 방형 석주를 세워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그 위는 팔각 삼층인데, 제1층은 4각으로 난간을 두르고, 제2층은 죽절형(竹節形) 기둥 8개에 싸인 
     탑신부 둘레에 8각의 난간을 두르고, 제3층은 귀두 모양의 옥개석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에도 각 
     층마다 변화를 주고 있다. 이 탑 기단의 4우에는 돌사자가 있었으나, 그 중 세 개는 분실되고 한 개만
     극락전(極樂殿) 에 있다

     
   ▼ 불국사 대웅전
     법화경에 의하면 세상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지만 ,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근본되시는 부처님이라고 한다. 
    사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을 대웅전 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에는 미륵보살님,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님이 서 있다. 이를 협시보살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양쪽의 협시 보살을 함께 모신 
     것을 삼존불이라고 한다. 미륵보살 좌측에는 가섭존자(선을 제수 받은 제자)를 모셨고, 갈라보살 우측에는 
     아난존자를 모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 

     
   ▼ 불국사 대웅전 경내 전경 대웅전, 석등, 석가탑, 다보탑 등 

     
   ▼ 극락전으로 갑니다 극락전은 연화교,칠보교를 거쳐 안양문으로 덜어 와야 하지만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대웅전 뒤쪽 회랑을 통하여 옵니다  불국사 전면 석축위 높게 조성된 대지위에 위치하고 있고 
      대웅전 영역보다 대지는 한단게 낮고 서쪽에 위치한다  극락전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 무량수경(無量壽經) 또는 아미타경(阿彌陀經)을 경전으로 삼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구현하는 곳으로  

     
   ▼ 극락전에는 국보인 통일신라시대의 3대불상중 하나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이 있으나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더물고 대부분 무한도전에 나온 극락전 현판뒤쪽의 황금돼지에 관심이 많타고 합니다 
      극락전 앞 마당에는 황금돼지 상을 아애 만들어 놓았군요 극락정토을 의미하는 것으로 탑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 하는군요  

     
   ▼ 극락전 회랑에서 석단 아래쪽 (부처님영역에서 범부의 세계를 내려보는 기분) 으로 내려다 봅니다  

 
  ▼ 뒷쪽에 있는 무설전(공사중) 비로전,
    관음전, 사리탑, 선원등 은 건성으로 
    본것도 아니고 안본것도 아닌것 처럼
    지나가 버렸네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수학하듯이 관람해야 하는데 ...
    아직까지 수양이 덜 된것 같습니다 
    여기는 종각 입니다 종은 원래 범영루
    에 있었다는데 여기에 다시 종각을 
    세운것 같습니다  
     
   ▼ 다시 왼쪽으로 돌아나와 전면으로 갑니다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그리고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까지 한장에 넣어 볼려고 하였으나 잘 되지 않은군요

     
   ▼ 소나무와 어우러진 청백운교, 자하문, 회량오른쪽 끝부문의 자경루  아름답고 일품 경치 입니다 
     청운교 백운교는 대웅전으로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의 명칭인데 다리아래는 일반인의 세계
     다리위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자하문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이라 표현하므로 불신에서 발산
     하고 있는 붉은금색의 광명이 서려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 백운교 청운교 전체가 33계단으로 
   되어 있고 아래 청운교는 17단 위쪽
   백운교는 16단으로 구분되고 33이란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
   즉 다리를 통해 꺄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
   로 표현하고자 하였고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이고 백운교는 휜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한다는 군요 
   불국을 이루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염
   원이 담긴 우리민족의 유산이 일제시
   밀반출만 당하고 올바르게 유지 하는
   것 없어 이렇게 사진 처럼 허물어지고
   있는 암울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 범영루와 회랑 
     泛影樓 지금은 법고(法鼓) 가 있으나 원래은 범종각(梵鐘閣) 임 751년에 세워졌다가 여러차례 중수 중건
     을 거쳐 1973년 불국사 복원때 옛 모습되로 다시 세웠다 기단의 돌기둥은 수미산을 본뜬 것이라 하고 
     때문에 수미범종각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극락으로 가는 길 입니다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安養門)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 전해지고 있다 
     연화교는 구성면에서 다른 다리와 비숫하지만 층계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톡특하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칠보교가 놓여 있다 
     동쪽의 청-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 것에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 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
     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뻐찌 익어가는 계절의 여행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되는 군요 석굴암을 보기 위하여 불국사 후문인
     불이문으로 나갑니다 

     
   ▼ 과거 불국사 관광을 하고 석굴암을 볼려면 하룻밥 묵어 새벽에 숙소를 나서 걸어서 토함산을 올라 일출과 
     석굴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일정이 였는데 그래서 경주관광을 오더라도 석굴암 구경은 좀체 어려운 것이 
     였는데 ... 지금은 차로 오릅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차길은 구절양장 같이 구비구비 돌아 가는 길 입니다 
     20분쯤 올랐나 산 등성쯤에 주차장이 나오는 군요  주차장에서 보이는 건물이 크고 웅장해서 사찰인가 
     생각 하였는데 알고 보니 종각 입니다 현판에는 불국대종각(佛國大鐘閣)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 대종각 옆 계단으로 오르니 매표소와 일주문이 나오는 군요 석굴암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였군요
     여기도 입장료 4000원 주차료는 없군요 

     
   ▼ 일주문을 지났으니 곧 석굴암이 나올줄 알았는데 진입로가 꾀 길고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나녔는지 
     길에 윤기가 납니다 한무리의 불자들이 소리 없이 행진하는 모습이 마치 유령 같아 한장 남겨 봅니다

     
   ▼ 걷기 지루한 마음이 들어 갈때쯤 해서 연등걸이가 가득한 너른 광장이 나오고 위쪽을 올려다 보니 
     석굴암이 보입니다    

 
  ▼ 여기 석굴로 덜어가는 입구 
    보존 관계인가는 모르지만 석굴입구에 
    집을 만들어 석굴인지 암자 인지? 알수
    없게 되여 있군요 
    여기 계단 두번째 턱이 조금 높아서 
    발끝이 걸려 넘어지면서 사진기 쥔
    손을 땅에 짚으면서 사진기를 망가
    먹었네요 속 탑니다 
    이후 사진은 자료사진이거나 화질이
    좋치 않은 헨드폰으로 찍은 사진 
    입니다 
    과거 여행자는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잘만 나녔는데... 
   고장나 쓰지 못하니 무지 답답합니다 
    여행하는 맛도 나지 않고 헛일 하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 잡히여 멍 합니다  
     
   ▼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당시에는 석불사라 불렸다
     석굴의 평면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활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
     여개 돌로 둥근 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조 한것이다 이 건축기법은 세계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
     이며 석굴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레에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거사상.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신중상. 
     등이 조각되어 있고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세계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세련된 
     조각 솜씨로 어우러진 걸작으로 신라예술의 극치이자 동양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 된다고 합니다 
     석굴안은 사진 찰영이 금지 되어 있고 불상이 있는 내부로 덜어갈수 없고 유리벽으로 차단되어 있어
     유리상자 않에 넣어 놓은 것 처럼 되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군요 과잉보호 같습니다
     과거 석굴암은 석굴형태 인데 훼손이 많이 되어 복원하면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군요 

     
   ▼ 석굴암이 위낙 유명하다 보니 전각도 세워지고 사찰형태로 발전한것 같습니다 석굴암 전제 조감 사진 
     차로 돌고도는 길을 올라 거금의 입장료를 내고 또 걸어서 언덕을 올라 본것이라곤 유리상자 안의 인형
     을 본것 같은 뭔가 많이 손해 본것 같은 느낌  다시는 올것이 없다는 생각 뿐 입니다 

     
   ▼ 석굴암을 나와 토함산 중턱에서 감포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내려 갑니다 
     가는 길에 장항리사지 경주 허브랜드에 들려 지났지만 소개할수가 없네요 그냥 보고 느끼기 만 하니
    그것도 편 하고 괜찬습니다  
     여기는 신문왕이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하여 축조하였다는 감은사지와 삼층 석탑 절은 간데 없고 
     석탑만이 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 감은사에서 나와 얼마가지 않아 비릿한 바닷 내음이 전해 오고 봉길 해수욕장이 나온다 초등학생들이 
     왁짜지껄 모여 있는 것이 뭔가 있는 모양인데 아 !!  바다 가운데 대왕암이 있군요 

     
   ▼ 대왕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大王巖)이라고 불렀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한편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부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682년(신문왕 2)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불력(佛力)에 의해 왜구를 막으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의 금당 아래를 깎아 동해로 구멍을 내어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견대 (利見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의 혼이 깃든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자 이다 
     이견대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곳이며 용으로 부터 세상을
     구 하고 평화롭게 할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피리를 하나 받았다는 전설도 여기서 비롯
     되였다 그 뒤 대왕암이 잘보이는 곳에 이견대를 짓고 역대 왕들이 참배 하였다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 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 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을 새로
     짓었다 합니다 

     
   ▼ 해안국도를 타고 감포 구룡로를 지나면서 이 지방의 특산물 과메기 생선회 등을  먹어 봄직한데 비린것을 
     싫어 하니 그냥 지나 침니다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장기꽃에 왔습니다  사진에서 만
     보던 바다에서 불쏙솟은 손을 구경합니다 바다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해맞이 공원에 하나와 서로 마주
     보며 호응하고 형상 입니다  

     
   ▼ 해맞이 공원과 등대 박물관을 둘러 봅니다 바닷가 소나무는 해풍에 못견디고 옆으로 살짝 누워 있습니다
     잎은 선인장 같이 생겼고 꽃은 국화 같은 꽃 이것이 해국?  고장난 사진기 탓만 하면 누가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헨드폰으로 몇장 찍어 봅니다 

 
  ▼ 포항을 거쳐 포항-대구 고속도로을 
    타고 집으로 돌아 옵니다 
    떠날 때는 기분 나는 되로 한 일주일
    놀다 올 작정을 떠났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맘이 변하네요 뭐 묻어두어
    녹아 없어지는 것도 없는데 ...
    그냥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생을
    살아 오면서 멋되로 마음 가는되로 
    하지 않고 특별한 일이 없어면 집으로
    오는 습관이 몸에 베어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언짠튼 기분도 풀어지고 관계는 땅의
    인연이라 글을 읽었으면서도 얽메어
    있다고 생각이 잘못된것 같다는 자각
    여행을 하는 방식도 조금 바뀌서
    천천히 음미 하면서 많은 것을 돌아
    보는 방식에서 한가지라도 뭔가 느낄
    수 있는 방식의 전환이 필요 한것을
    얻었으니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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