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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남도여행 여섯번째 남원


♧ 여수 오동도를 출발하여 남원 광한루원
서문 모퉁이에 있는 주차장에는 오전 11:30
분쯤에 도착한다
광한루원 서쪽 담장과 나란히 기념품 가게
가 줄지어 있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서문으로 간다
서문매표소에서 매표를 할려다
시간을 보니 점심 시간이 다 되어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 처럼 배가 차야
관람도 잘되니 근처 식당을 찾는다
서문 주위에는 전부 추어탕 집이다
남원하면 추어탕

◀ 추어탕은 남원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으로
미꾸라지를 익혀 통째로 갈아 넣고 채소와
된장과 함께 끓여낸 음식이다. 남원에는
국내 5대 강 중 하나인 섬진강 지류인 청정
하천이 곳곳에 흐르고 있어 민물고기가 많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남원 추어탕은 탁월한 강정, 강장효과뿐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자양 식품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또한, 세포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 미용과
고혈압에도 효과가 뛰어나다.
현재 남원 광한루원 주변에는 추어탕 거리가 형성
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굳이 맛집을 찾지 않고 발길 닿는데로
덜어간다 파전과 추어탕 맛이 먹을만 하다
    ▼ 광한루원 서문으로 덜어 갑니다 광한루와 오작교 연못이 보입니다

    광한루의 전신은 광통루(廣通樓)다. 광통루는 조선 초기의 문신 황희가 그의 벗들과
    어울려 산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세월이 흘러 황폐화 되자 세종 때의 부사 민공이 다시 고쳐지었고 그 후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조 정유년의 왜란 때에 불타 없어진 것을
    남원 부사 원신이 소규모로 다시 지었고, 인조 대에 와서 비로소 오늘날의 광한루
    모습을 갖추었다.

    ▼ 광한루앞 연못 물반 고기반

    본래 이곳은 1419년 황희가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그런데 세종조에 정인지가 누원의 경치를 보고 감탄하여 마치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하여 광한루로 이름을 고친 것이라 한다.
    그 후 남원부사로 부임한 장의국은 광한루를 중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상징하는 못을 만들었다.
    이곳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도 함께 설치했다.

    ▼ 광한루쪽에서 서문쪽으로 본 풍경

    ▼ 오작교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하였으니 연못의
    물은 은하수요 오작교가 없을수 없지 ...

    ▼ 광한루

    보물 제281호.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
    (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다.
    인공정원 속에 건립된 대표적인 누인 광한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팔작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다락집이다.

    ▼ 방장도에 있는 방장정 (方丈亭)

    ▼ 영주각이 있는 영주도를 싸고 있는 연못

    선조조에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선도를 조성했다.
    그리고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라는 정자를
    세웠으며 또한 연못에 연꽃을 심어 광한루원을 신선의 땅으로 승화시켰다.
    조선시대 정원은 유교문화, 풍수지리, 음양오행설, 신선사상 등에 그 기초를 두고
    조성되었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는데 광한루원 역시 이를
    바탕으로 조성된 대표적인 고정원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배롱나무꽃이 잘피어 있고 경치좋은 집이 있어 찾아 봅니다 여기는 춘양사당 이군요

    열여 춘양의 굳은 절개를 흠모하기 위하여 건립된(1931) 사당이며 사당의 문은 임향한
    일편단심을 줄여 단심문이라 칭한다고 하며
    사당 중앙에는 열여춘향사(烈女春香祠) 라고 쓴 현판이 있고 안에는 의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워진다고
    하여 참배객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춘향사는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고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였다고 합니다

    ▼ 여기는 완월정 (玩月亭)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 에는 광한전이 있고 은하수 위에 오작교가
    놓여있다 계관(달나라 궁전)의 절경 속에서 아름다운 선녀들이 노닐었다고 한다.
    이를 재현한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완월정은 이 달나라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겹치마 팔작지붕의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 양식이다


    ▼ 월매의집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덜어가 구경합니다
    월매의집 행량채 (대문이 딸린집) 방에는 방자가 밥상을 받고 있다

    ▼ 월매의집
    안방에는 월매와 매파의 담소가 있고 부엌에는 향단이 밥을 짖고 있다

    ▼ 월매의집 뒤안에는 기원단이 있고 장독대 장작단도 있습니다

    ▼ 별당에는 이도령과 춘향이 주안상을 받고 있군요
    별당앞 연못에는 동전 던지는 곳이 있군요

    ▼ 월매의집 나가 정문쪽으로 가니 춘양관이 있군요

    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고장이다. 남원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춘향이 눈물방죽’을 시작으로 광한루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춘향을 상징한다.
    이 지방에 전해지는 판소리와 국악의 중심에도 춘향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한루원이 단지 춘향과 관련된 무대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글과 이야기와 노래로 전해지는 허구일 뿐이다.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무대이기보다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조영한 관아원림
    이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광한루원은 관아원림을 대표하는 고정원으로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는 누각을 지어 경영한 예가 많았다.
    남원의 광한루를 비롯해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루,
    무주의 한풍루 등이 모두 지방관아에서 지은 공루다.
    이러한 누각들이 서 있는 위치는 대부분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장소를 선택해 누각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광한루는 누각과 더불어 고정원이 매우 아름답게 조성된 특별한
    관아원림이다.

    ▼ 광한루원의 광장 과 안에서 본 정문

    광한루원은 정유재란 때 누각이 소실 및 황폐화된 후 1639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이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수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공간의 구성이 바뀌고 시설이 추가되어 현재의 광한루원을 형성했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가장 큰 변화는 《춘향전》에 의한 장소의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한루원은 1419년에 설립되어 약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춘향전》과
    관련된 춘향사는 1931년에 지어졌다.


    ▼ 광한루원의 정문 현판에는 청허부(靑虛府) 정문 옆으로 매표및 안내소

    요즈음 광한루원을 찾는 이들의 상당수가 이곳이 조선시대 지방의 관아원림을 대표하는
    고정원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모른 채 《춘향전》의 무대로만 기억하고 있다.
    사실 《춘향전》이라는 이야기가 광한루원의 장소성을 변화시킨 것은 춘향사가 건립된
    이후 불과 8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광한루원에 대해 일반대중이 이처럼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 상황을 고려해보면
    명승으로 지정된 국가유산의 정체성에 관한 올바른 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 광한루원의 돌담과 능소화
남원 광한루원을 끝으로 남도 여행이 끝이납니다 여행은 즐거운 겁니다
2박3일 피서보다 더 좋은 마음의 피서
를 한 기분 입니다

광한루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조선시대
의 관아원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관아원림의 특성이 잘 나타날 수
있도록 관아정원을 완전히 복원해야 한다.
이러한 정비를 통해서 광한루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체성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위의 모든 설명출처 다음백과
관아원림의상징 광한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