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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문화 탐방 우암사적공원



  
   ♧ 송촌의 동춘당을 접하고  兩宋의 한분인 우암이 생각나고 남간정사를 봐야  문화탐방이 완성될것 
     같은 생각에 더퍼리에 가보고 싶어진다  더퍼리는 백숙집이 있어 직장에서 모임과 회식때 종종 
     가보던 곳이 였고 갈때마다 남간정사는 곁눈질로 흩고 아무느낌 없이 지나쳤는데 ...
    안가본지가 꾀 오래 되였는데 ... 어떻게 변하였는지 그대로 인지? 
    그 옛날에는 동춘당과 우암은 걷던가  말을 타던가 그당시의 교통수단으로 서로 왕래 하였을 것을 
     상상하며 지금은 차를 타고 가기는 멋도 없을뿐더러 옛날 그당시의 가까운 수단으로 가고 싶어 
     산길로 (둘레산길 제5구간중) 걸어서 더퍼리 구경을 가기로 한다   
     더퍼리는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고 우암사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 송시열
 * 자(字) : 英甫(영보)
 * 호(號) : 尤庵(우암)
 * 년    대 : 1607년(선조40) - 1689년(숙종15)
 * 관    직 : 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 거주지 : 회덕 송촌, 비래(송촌동, 비래동)
 * 저    서 : 주자대전잡억 외 8건 / 
                문 집 : 우암집, 송자대전
 * 묘    소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尤庵(우암), 
 본관은 은진 아버지 송갑조(사옹원 봉사)와 어머니 
 선산곽씨(봉사 곽자방의 女)사이에 3남으로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친척인 동춘 송준길의 집(회덕 송촌)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일찍부터 회덕과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26세 이후에는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동 
 등지로 옮겨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회덕인이라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기묘록』등을 
 배우면서 주희·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19세에 한산이씨(도사 이덕사의 여)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 사계 김장생(연산 거주)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31년(인조9) 김장생이 졸 하자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었다. 
 27세(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29세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약 1년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중단되었다. 이때 인조가 오랑캐에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송시열은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이후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효종)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일찍부터 북벌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즉위와 함께 척화파와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
 하였다. 송시열 역시 진선·장령 등의 관직으로서 
 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시무책인 <기유봉사>를 올렸는데, 
 그 중 특히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산림세력이 
 북벌기도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서,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계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53년(효종4) 이후 목사집의·
 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예로 
 치루었고, 상을 마친 1657년에 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대신 <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658년(효종9) 7월 찬선을 제수받았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약 8개월간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하에 북벌 계획을 주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이 급서하자 상황은 
 일변되었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김우명 
 계열과의 갈등과 현종에 대한 실망이 중첩되어 
 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현종은 융숭한 예우로서 중용하려 했지만, 
 우의정(1668년)과 좌의정(1673년)으로 조정에 잠시 
 나아갔을 뿐 주로 재야에 물러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자문을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15)의 2차 예송에서는 상황이 
 일변하였다.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는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고, 다음해에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지만, 1680년 경신
 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고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가 되었으며, 또 봉조하에 올랐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 하고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김익훈(김장생의 손자)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서인계 소장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가 가세하여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후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
 을 원자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송시열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후 신술환국(1694년)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후 전국적으로 70여개소의 서원이 설립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이 37개소였다. 화양동서원 만동묘 
 여주 대로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1726년(숙종42)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그러나 더 연원적으로는 조광조를 숭앙하였고, 
 특히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자로 자부하며 주자의 
 교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철학사상은 조광조의 실치주의,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시열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과 학문적 성과는 
 이후 조선사회의 정치·사회·사상을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修己治人(수기치인 : 정치원리), 
 養民爲主(양민위주 : 정책목표), 禮治主義(예치주의 : 
 정치이념) 로 요약되며 사회사상은 그의 사회 신분관과 
 양민정책, 
 그리고 유교적 풍속의 장려 등에서 발견된다. 
 기존의 양반 지배 체제나 노비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의 특권적 성향은 제한되어야 하고,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송시열의 문장은 한유·구양수의 
 문체에 정주의 의리를 지조로 하여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그는 모든 형식의 글에 다 능했으나 특히 묘문 등에 
 명성이 높았는데, 寧陵誌文(영릉지문)은 최고의 
 명문이다. 서체는 처음은 안진경체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였는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글과 글씨는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송시열의 저서로는 『주자대전잡억』외 8종이 있고. 
 문집으로는 1717(숙종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편집·간행한 철활자본『우암집』이 있으며, 1787년
 (정조11) 일문을 수집·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이 있다.
     
   ▼ 우암 사적공원 안내문과 안내도 (크릭하면 크게 볼수 있습니다 )

     
   ▼ 남간정사로 덜어가는 외삼문 (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 


  
   ▼ 남간정사 앞 연못과 기국정 
     기국정(杞菊亭)은 원래 소제동(蘇堤洞) 송시열 고택에  있던 송시열선생의 별당(別堂) 이었는데. 
    정자 주변에 국화(菊화)와 구기자(枸杞子)가 많이 심어진 것을 본 유생들이 정자의 이름을 
     기국정(杞菊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 초가지붕이었으나,그의 장손 은석(殷錫)이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였으며, 도시가 발전하면서(일제강점기 대전역 건설)  소제호(蘇堤湖)가 매몰되자 1927년에 
     현재의 위치인 남간정사(南澗精舍) 옆으로 이건(移建)하였다.                


  
   ▼ 시유형문화재 1호  남간정사 (南澗精舍) 대전 동구 가양2동 67  
     남간정사는 조선 숙중때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선생(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전국의 유림(儒林)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유림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
     (宋子大典)을 펴내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간(南澗)이란 양지 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가르키는 말로,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
     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을 가진다. 남간정사기둥에 인용한 시 한절이 매달려 있다. 


남간정사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건축사와 조경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조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과 돌이다. 이 두가지 요소를 자연 속에 인위적으로 꾸며놓고 마치 
     자연 속에 집과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동쪽의 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은 
     연못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작은 폭포를 만들고 대청 밑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은 정사앞 연못에서 
     합쳐진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하나 두고 나무를 심어 두었는데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의미한다. 
    한쪽 못 가에는 바위로 주변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런 모습이다.  


  
  ▼ 근래 만든정자 정자 앞으로 바탕골 약수터로 가는 길이 있다   

 
   ▼ 조경도 잘 되어 있고 서원쪽으로 갑니다 


  
  ▼ 홍살문  문멀리는 서원으로 덜어가는 명정문이 보입니다    


  
  ▼ 홍살문에서 명정문으로 오르는 길의 소나무 조경도 잘되어 있고 


  
  ▼ 서원 옆면과 서원 배치도    

 


  
  ▼ 이제 서원으로 덜어가 봅니다 서원담장과 외삼문 (명정문) 창경궁의 明政門을 본딴게 아니고 여기서
    정자가 바를正자를 쓰고 있네요 밝고 바른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봅니다    

     
   ▼ 명정문을 덜어서니 정면에 기단위로 이직당이 보이고 기단 좌우로 인함각과 명숙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직당은 마음을 곧게 쓰는집 이라는 강당으로 우암선생의 직(直)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함 
     인함각 모든괴로움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선비들의 공부방
     명숙각 모든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밝고 맑게 하라는 뜻으로 선비들의 공부방 


  
  ▼  이직당 뒷쪽으로 갑니다 또 한단이 높아져 있고 계단을 오르면 잔듸광장이 있고 양 옆으로  
     심결재와 견뢰재가 있고 정면으로 한단 높혀 남간사의 외삼문인 현도문이 보인다 
     심결재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의 선비들의 공부방
     견뢰재 우암선생의 마지막 교훈을 받들고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뜻으로 선비들의 공부방   
     현도문은 굳게 닫쳐저 있어 밖에서 남간사의 현판만 한컷 찍어 봅니다 
     남간정사의 뒷편에 과거부터 내려온 남간사가 있고 우암사적공원을 조성하면서 서원과 같이 여기에
     다시 만들어 제 행사을 전담하는 것 같군요 우암선생을 제향하는 남간사 


  
  ▼ 서원을 나와 조경이 잘되어 있는 위쪽으로 갑니다         


  
  ▼ 덕포루(德布樓)   


  
  ▼ 덕을 널리 베푼다는 덕포루와 연못 조경이 잘 되어 있습니다      

 


  
  ▼ 더퍼리 서낭당 쪽으로 나갈수 있는 뒷문과 덕포루 뒷쪽 조경     


  
  ▼ 이곳까지 온김에 여기서 가까운곳에 박팽년선생 유허비가 있는 것을 지나치면서 봐 왔는데 한번 
    찾아 봅니다  그런데 많이 변하여 잘 찾지 못하고 주택가를 헤메고 다닙니다 
    주민들도 잘 모르고 있군요 마침 한 아주머니가 일러주어 가까스로 찾아 갑니다 


  
  ▼ 박팽년선생의 유허비와 생가터 모습들 


  
  ▼  문화재자료 8호  박팽년선생유허비 (朴彭年先生遺墟碑)  대전 동구 가양동 197
     유허비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인 박팽년(1417∼1456)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하여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때에는 신숙주·성삼문·유성원 등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펴다 실패로 끝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치었다. 
     이 후 그의 높은 절의를 기리어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는 선생이 계시던 옛 건물터의 주춧돌들을 모아 세운 것으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웠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에,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겼다. 
     현종 13년(1672) 비각을 세우고 ‘장절정(壯節亭)’이라 이름하여 비를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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