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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문화 탐방 懷德 宋村


  
   ▼ 계족산 산행길에 들린 
     송촌당 관련자료를 
     검색하다 노란바탕의 
     지도한장을 발견합니다  
     대전에 오래 살면서 
     대전을 기반으로 하는
     송씨가 있다는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분
     들이 남긴 문화 유적들을 
     접하며 한번쯤은 알아볼 
     필요와 흥이 생겨
     지도가 표시 한데로 
     답사를 해볼 요량으로
     읍내동으로 갑니다 
  
   ▼ 도로변 소공원에 돌탑과 함께 조성 하였군요  당아래 돌장승은  장승이라기보다 남성기 같은 
     느낌 입니다  갑천변의 당아래 마을에 [당산아래 배배마을(갑천 배 메던 곳)]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 읍내동 사거리에서 대덕문화원을 지니 두번째 골목으로 덜어가  홍원모어사 영세불망비를 봅니다
     지금은 공사중이군요  아래 자료사진으로 대신 합니다 
     『1784년(정조8)에 태어나 1835년(헌종1)에 타개했는데 벼슬은 통정대부로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는 46세 때인 1829년(순조29)에 암행어사가 되어 회덕지방의 민정을 살피던 중 기아와 질병으로 
       허덕이던 회덕민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몸소 앞장서서 규휼책을 강구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해 
       주었다. 이에 고을에서는 그가 떠난 뒤 홍원모의 선정을 기리기위해 1831년 4월에 강덕환이 비를 
       세우고 16년 뒤인 1847년 5월에 연재호가 보호비각을 세웠다. 』 


  
   ▼ 회덕동 주민센터 
     고려 태조때 부터 쓰인 회덕은 덕을 품었다는 뜻으로 1000년 선비문화가 면면히 이어오는 고장이고
     이곳은 옛 회덕현 관아가 있던곳으로 과거 회덕면 사무소 자리이기도 하다       


  
   ▼ 회덕의 변천유래비와 비문      


  
   ▼ 역대 현감의 공덕비 와  회덕현 관아터, 공덕비와 현감 조이숙의 공덕에 관한 설명 있습니다       


  
   ▼ 대덕구에서는 둘레길로 스토리가 흐르는 녹색길을 조성 하면서 여기 읍내동에서 봉황마당까지 
     덕을 품은 회덕길로  하나로병원 앞에서 봉황마당까지 이르는 동춘당 생애길을 산디마을에서 봉황정
     까지 산디마을 산신제길로 명명하고 한참 공사 중이다              


  
   ▼ 읍내동 뒷골로 갑니다 
   『읍내동 뒷골 돌장승 이 마을에 장승이 세워진 것은 1920년대로 약 80여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장승 
     대신 탑을 모셨는데, 큰 홍수로 탑이 떠내려가 버려 지금의 장승을 깎아 세우게 되었고, 장승을 다듬을 
     때는 마을의 솜씨있는 사람이 얼굴 부분을 조각하고, 가슴에 명문은 송만영 이란 사람이 새겼다고 한다.  
    뒷골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매년 정월 열나흩날에 마을의 무사를 비는 거리제(장승제)를 지낸다. 』    


  
   ▼ '회덕 굴다리'는 회덕동주민센터 옆 읍내동 계족산 덕을품은 회덕길을 걷다보면 철길(경부·호남선)로 
      인해 8개의 굴다리가 있어 회덕주민들은 굴다리축제도 열어 회덕의 문화축제을 이어간다 
      지난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시설된 회덕 굴다리는 조차장건설로 인한 굴다리 증가 고속철도 
      건설로 증가되어 그 세월만큼이나 변화되어 현재 8개의 굴다리는 우리 삶과 애환을 간직한 채 현재
      까지도 그 소통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 굴다리를 지나  30년 방아만 찧어 왔다는 뒷골 방아간을 지나 큰길로 올라 육교에 올라서면 아래로  
    고옥이 내려 보인다  여기가  제월당과 옥오제 


  
  ▼ 제월당은 1676년(숙종2)에 건립된 이 건물은 조선조 숙종 때 문관을 지낸 제월당 송규렴(宋奎濂)의 
    별당건축이다. 제월당과 담을 사이에 두고 바로 뒤 북측으로 본가의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이 사랑채에는 제월당의 아들 송상기(宋相琦)의 호를 따서 붙인 옥오재(玉吾齊)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이곳에서는 다른 양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남녀 공간의 엄격한 구별이 다소 누그러져서 여유가 있고 
    개방된 느낌을 준다. 1990년에 들어와 대전, 신탄진간 산업도로가 나면서 건물 일부가 뜯겨졌고, 
   또 한국 전쟁시에는 인민군 정치보위부로 사용하여 건물이 훼손되고 고서가 불타는 등 수난을 겪은 
    문화재이기도 하다.  


  
  ▼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넘어로 찍어 봅니다 
   『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 1630∼1709) 선생은 효종 4년(1653)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典籍)과 삼사(三司)의 언관(言官)을 두루 거치고, 현종 4년(1663)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후 일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숙종이 즉위한 후 그의 두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이 유배당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이 건물을 지었다(현종 2년, 1676). 건물 이름을 「제월(霽月)」이라 한 것은 
      그의 선조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가 마음속에 깊이 담고자 했던 광풍(光風)과 제월(霽月)의 쌍청(雙淸)
     중에 하나인 제월을 취했음이며, 이는 선조의 맑은 뜻을 잇고자 함이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제월당 건물은 홑처마 민도리집이다. 
     옥오재는 ㄷ자형 평면에 안채와 사랑채를 겸하게 꾸민 전통적인 민가양식으로서, 옥오재 송상기
      (玉吾齋 宋相琦) : 1657∼1723,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가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와 건물 이름을 「옥오(玉吾)」라고 한 것은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玉)을 택하겠다는 소신 
      즉,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말과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선생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강진에 유배되어 유배소(流配所)에서 
      별세하는 최후를 맞이해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선생은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문정(文貞)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 여기서 부터 법동 고속도로 굴다리 까지는 송촌 생활 체육공원을 따라 내려 갑니다  


  
  ▼ 체육시설과 산책길이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 법동사거리 부근에 석장승 2기가 마주보고 서 있다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장승으로 대전지역에 
    남아 있는 돌장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으로 손꼽힌다. 법동 장승은 본래는 나무장승이었으나 
    약 300년전 법천골의 갑부였던 송민노가 사재를 털어 지금의 돌장승으로 바꿔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남장승 곁에는 길쭉한 선돌이 함께 서 있는데, 이는 남성을 상징하는 돌로써 자손의 번창과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마을에서는 이것을 아기 장승이라 부르고 있고, 단지 큰 장승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장승 옆에는 남장승과 대조를 이루는 타원형의 선돌을 세워 
    놓았는데 생김새로 보아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남녀의 결합에 의한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흩날 저녁이면 장승 앞에서 거리제를 지낸다.


  
  ▼ 법동사거리에서 상가를 가로 질러 법동전통시장을 지나고 송씨 정려가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 은진 송씨 정려각(시 유형문화재 제24호)    

     
   ▼ 정려의 주인은 효녀 은진 송씨로서 송담 송남수의 딸로 계림군 김정의 후손인 김광유의 아내이며 
     송애 김경여의 어머니이다. 송씨는 회덕현 백달촌 중리에서 태어나 22세에 김광유와 결혼하였으나 
     몇 달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어서 남편을 뒤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부친의 만류로 죽지 
     못하고 부모에게 귀의하여 유복자 경여를 훌륭하게 키웠다. 
     유복자 김경여는 조선 효종 때의 문관으로서 옳은 일과 나라 일을 많이 한 충신이다. 
     김경여는 경주가 본관이며 동춘 송준길이나 우암 송시열보다 10여살 연상이지만 한 마을에 살면서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으며 효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가 자라서 성공한데는 어머니 송씨의 덕이 크며 송씨는 자식에게 뿐만이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노환으로 백약이 무효할 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뼈를 갈아 복용시켜 장수케 하여 90상수
     (上壽)를 누렸다 한다. 그는 효녀로서, 어머니로서 정성이 지극하여 1729년(영조5)에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  송애당 앞 바위 암각문  법천석총이란 법동의 샘으로서 물이 솟아나 돌에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이 암각은 현재 송애당 앞에 있는데 원래는 비래암 근처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며 
     "회덕읍지 고적조"에 의하면 이 암각은 법천사 아래에 있었고 동춘 송준길의 글씨라 적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비래암과 법천사는 어떤 관련성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송애당의 대문과 전경


  
  ▼ 송애당 조선조 1633년(인조11)에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 때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경여(金慶餘)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가 환도 후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짓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당호를 송애당이라 하고, 자신의 호를 이때부터 
    송애당이라 하였다. 
    송애당 김경여는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사계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러한 관계로 송시열, 송준길과는 
    동학이며 항상 같은 계열로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병자호란 후 효종은 은밀하게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노론의 거두로서 정치적 입지가 막강했던 우암 송시열 또한 북벌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하였다. 
    우암은 북벌문제를 가깝게 지냈던 동춘당 송준길, 송애당 김경여와 심각하게 상의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논의는 이 세사람의 고향에서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송애당이다. 
    따라서 송애당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을 논하던 역사적인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 송애당의 옆면과 뒤면      


  
  ▼ 쌍청당과 은진송씨 대종가 
     쌍청당은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부사정
     (副司正)을 지낸 송유(宋愉:1389~1446)의 별당이다. 쌍청당이란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박팽년(朴彭年)이 지어준 당호인데,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의 기상을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 청풍명월 하면 어느 지역이 떠오를까? 아마 충북 청풍이나 브랜드화 된 쌀 이름이 생각 될 것이다. 
    그러나 청풍명월의 본 향은 바로 대전 회덕이다. 
 
       쌍청당記 와 쌍청당 송유   
    쌍청당은 은진 송씨 중시조인 쌍청당 송유(1389~1446)에 의해 세종 14년(1432)에 건립된 별당
    건물이다. 
        이 별당의 쌍청당 기(雙淸堂記)에서 박팽년(朴彭年)은
    천지의 사이에서 바람과 달이 가장 맑다. 
    사람의 마음도 또한 그와 더불어 다름이 없으나 다만 형기(形氣)에 얽매이고 물욕에 더럽혀지는 
    까닭에 능히 그 몸을 오로지 하는 자가 적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어둑하다가도 맑은 바람이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뜨면 위와 아래가 통명하여 털끝만한 
    점철(點綴)도 없으니, 그 기상은 진실로 형용하기 어려우나, 사람이 능히 그 마음을 온전히 하여 
    더럽힘이 없는 자만이 족히 감당하여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舂陵)에 견주었고, 소강절(邵康節)도 또한 청야(淸夜)의 시가 있으니, 
    그 맛을 아는 자가 적음을 한탄한 것이다. 요즈음 세상에도 또한 그 낙을 아는 이가 있단 말인가.
    시택(市澤) 송공(宋公) 유(愉)는 본래 옛날에 벼슬하던 사람인데, 공명을 좋아하지 않아 촌락에 
    물러가 산 지가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 그 고을은 충청도 회덕(懷德)이요, 마을은 백달리(白達里)다. 
    거실의 동쪽에다 사당을 지어 선세(先世)를 받들고, 몇 이랑의 밭을 두어서 제사의 찬수에 이바지하며, 
    사당의 동쪽에 따로 당(堂)을 세워 모두 7칸인데, 중간을 온돌로 만들어 겨울에 적당하게 하고, 
    바른편 3칸을 터서 대청을 만들어 여름에 적당하게 하고, 왼편 3칸을 터서 포주(庖廚)와 욕실(浴室)과 
    제기(祭器)를 저장하는 곳을 따로따로 만들어 단청하고 담장을 둘렀는데, 화려해도 사치하지 않았다. 
    매번 시사(時祀)나 기일(忌日)이 되면, 공은 반드시 심의(深衣)를 입고 그 당에 들어가 재계하고, 
    공경과 정성을 다하며, 모든 제사에 대한 범절은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준수하고, 또 명절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청하여 혹은 시를 짓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黨)의 환심을 흡족히 
    하였으며, 만년에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하게 갖고 사물에 구애되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그 성품이 고명하여 명리(名利)를 무시한 것이다. 
    중추(中樞) 박연(朴堧)공이 그 당을 쌍청(雙淸)으로 편액하여 시를 짓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한 따라서 화답하였다. 나는 듣고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쌍청의 설이 이것인가. 백이(伯夷)는 
    성인의 맑은 자인데, 공은 백이의 바람을 듣고 흥기한 것이었던가. 대개 바람은 귀로 듣고 달은 
    눈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두 물건의 맑음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그 아는 자를 알지 못하는 자와 더불어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지금 공의 선영을 받드는 정성과 손님을 즐겁게 하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기는 취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호상(濠上)에서 고기를 구경하는 낙(樂)은 장자(莊子) 
    자신도 어째서 즐거운지 알지 못하였고, 물고기를 즐김은 혜자(惠子)도 역시 어째서 즐기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내 어찌 감히 그 한구석인들 엿볼 수 있겠는가. 공의 영윤(令胤) 주부(主簿) 
    계사(繼祀)는, 내가 자기 말속(末屬)에 있다는 것으로써, 졸렬한 문장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기를 
    쓰게 하므로, 그 말을 듣고 기록한다.”라고 적고 있다.  
     송유 宋愉
   * 호(號) : 쌍청당(雙淸堂)
   * 년    대 : 1389년(고려창왕 1) - 1446년(세종28)
   * 관    직 : 호분위 부사정(종7품의 군직)
   * 거주지 : 회덕 송촌(백달촌, 중리동)
   * 유    적 : 쌍청당(중리동)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황학산 
   송유는 조선 전기의 문관·학자로 호는 雙淸堂(쌍청당), 본관은 은진이다. 고려말 사헌부 집단을 
   지낸 송명의(회덕 입향조)의 손자이며 진사 송극기의 아들이다. 
   1392년(태조1) 아버지가 개성에서 요절하자 4살난 송유는 어머니 류씨부인(나이 22세)의 등에 
   업혀 회덕의 조부댁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일찍 관례를 치루기도 전에 벼슬하여 호분위 부사정(종7품의 군직)이 되었으나,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태묘에 부해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 백달촌에 내려와 별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자연을 즐기며 살았다. 이때 지은 별당이 쌍청당이다. 
   쌍청당의 당호는 중추부사 박연이 지어준 것이고, 당기는 박팽년이 지은 것인데 '쌍청'은 그의 
   청정한 성품과 모습을 한마디로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송유 때로부터 회덕의 은진 송씨가 창성하였으므로 후인들이 백달촌을 (하)송촌이라 칭했다. 
   회덕의 은진송씨는 모두 송유의 후손들이다. 
   청정한 삶을 살다가 58세로 졸하였다. 묘는 판암동 황학산에 있다. 
   송유의 행장은 송준길이 지었으며, 묘표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그리고 묘 아래의 묘표는 김상헌이 짓고 김집이 썼으며, 두전은 송준길이 썼고, 갈음자손기는 
   송준길이 짓고 썼다. 숙종 때에 박팽년과 함께 회덕 정절사에 배향되었다. 
   쌍청당은 중리동 위치해 있는데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유가 남긴 글로는 서간문인 「여박난계연서」와「여금괴애수온서」및 시「제의봉루」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쌍청당은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7.54m), 측면 2칸(4.4m) 크기로 세운 남서향 건물이다. 
    오른쪽 2칸은 대청이며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그 북쪽으로 반 칸짜리 달림채를 두고 윗부분은 반침
    (半寢)으로, 아래는 함실로 사용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로 다른 주택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단청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또한 근처에 남아 있는 이와 비슷한 별당 건축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유적이며 은진송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432년(세종 14)에 송유가 처음 지었으나 이후 1524년(중종 19), 1563년(명종 18), 1597년(선조 30), 
    1616년(광해군 8), 1708년(숙종 34), 1888년(고종 25), 1937년 이렇게 7차에 걸쳐 중수(重修)되었다. 
    집 안에는 박연(朴堧)의 제(題), 김상용(金尙容)의 쌍청당서액(雙淸堂書額), 박팽년과 안평대군 등의 
    제시(題詩) 및 기문(記文) 등이 남아 있다.  


  
  ▼ 은진(恩津)을 본관으로 하는 송씨는 고려 판원사 대원(大原)을 시조로 하여 많은 학자와 현인을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4세 집단공 송명의(宋明誼)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회덕에 내려와 은둔한 선비였다. 중시조인 6세 송 유(宋兪)는 청상고절(靑孀孤節)의 열부(烈婦) 
    류조비(柳祖妣)로 추앙받는 어머니를 모시고 회덕 배달촌(白達村)에 정착하니 그 땅이 
    대전시 대덕구 송촌(宋村)이다. 
    그 곳에 조촐한 당을 지어 명사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하니 세인들은 그를 은덕불사의 처사 
    쌍청당(雙淸堂)이라 불렀다. 
    7세 지평공 송계사(宋繼祀)와 송계중(宋繼中)대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현창하여 호서사림의 연원이 
    되었고 조선 유학의 대표적 인물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대학자가 배출되어 
    동국(조선을 중국의 동쪽에 있어 동국이라 함)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 정신은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어 문중에는 학자와 충신 열사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분이 연방소과(小科)에 236명 용방 대과(大科)에 75명 호방 무과(武科)에 
    80명이나 된다.   


  
  ▼ 은진송씨 종손들이 계승하고 있는 원일당  


  
  ▼ 은진송씨 대종가와 쌍청당 조망사진

  
   ▼ 정려공원 한편에 정려각이 있습니다 고흥류씨 정려각 (유형문화재 25호)이군요 
     정문 옆에는 1665년(현종6)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쓴 정려비가 서 있는데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유씨 부인은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이다. 그는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 상서를 지낸 호안공(胡安公) 
    유준(柳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진사 송극기(宋克己)와 혼인하였으나 약관의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22세에 홀몸이 되었다. 청상의 몸으로 유복자 송유와 함께 개성의 친정에 살고 있었으나 
    가엽게 여긴 친정에서 재혼을 종용하였다. 당시 사회풍습으로 재가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얼마 후 풍습대로 친정에서 재혼을 서두르자 한밤중에 아들을 데리고 500리가 넘는 시가인 이곳 회덕으로 
    내려왔다. 재혼에 뜻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 후 유씨 부인은 시댁에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성장시켰다. 생전에 그는 효행이 뛰어나 그 소문이 자자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세상을 뜨고 나서 약 200년 후인 1653년(효종4)에 그의 정절을 기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구릉지에 주위를 담으로 에워싸고 그 안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정면, 측면 각 1칸의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정려각에 쓰여진 각종 재료가 견실하고 조각과 단청이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품격 높은 정려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송촌에는 유씨부인 정려, 이시직 충신정려, 송씨삼세 효자정려가 있다. 옛 부터 송촌을 일컬어 삼강려 
    고을이라 불렀으니 충신, 효자, 열녀를 배출한 마을이란 뜻이다. 
    송촌동 마을입구 버스종점에서 동춘당방향 도로변 왼쪽편에 커다란 바위가 위치해 있고 
    이곳에 상·하송촌리 삼강려라 새겨져있다. 상·하송촌리는 지금의 송촌동을 상송촌, 중리동 쌍청당 
    지역을 하송촌이라 하였고 한마을에서 충신, 효자, 열부를 모두 배출한 것은 전국적으로 그 유래를 
    찼기 어려운 일이니 이는 회덕 송촌이 조선시대 전형적인 선비의 고장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송촌의 삼강려 중 유씨부인 정려와 이시직 충신정려는 지금까지 잘 남아 있지만, 송씨 삼세 효자 정려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려 구허비만 남아 있다.  


  
  ▼ 이시직공 충신 정려각(李時稷公 忠臣 旌閭閣)  시 문화재 자료 제36호 
    이시직 공은 회덕인으로 자는 성유(聖兪)이며 호는 죽창(竹窓)이다. 1572년(선조5) 청암도 찰방을 
    지낸 이빈(李賓)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10세 때 조호익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사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606년(선조39) 3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1) 
    52세에 별제(別提)가 되었다. 이듬해 직장(直長)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그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 임금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곧이어 종묘서 직장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후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필선 등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강화가 함락되자 묘 둘을 파서 자결한 송시영(宋時榮)을 
    매장하고 노복에게 자기를 남은 묘 한곳에 매장하라고 한뒤 자신은 활끈으로 목을 매 자결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목(忠穆)이라는 시호와 함께 충신정려를 받았다.  

  
   ▼ 현재 동춘당 공원은 
     약 1만 7천평으로 
     송촌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하여 
     동춘당 일대를 공원화 
     한 곳으로 공원 후편에 
     운동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산림환경과 
     동춘당앞 일대에 
     너른 마당과 연못을 
     조성하여 인근 아파트 
     주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 
     동춘당 명품공원화 
     사업을 진행하여 공원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공원 전경 


  
  ▼ 공원내의 연못과 정자  연못과 연못을 수로로 연결 조성하여 시골의 개울을 연상케 하였군요   


  
  ▼ 동춘당 앞의 고목 느티나무와 공원  하늘과 어울린 소나무


  
  ▼ 동춘당은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주위는 간결하게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동춘당은 뒤쪽에 저만치 
    물러나 앉아 있다. 마치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위를 꾸미지 않았고 
    다만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다. 기호학풍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청 창호는 방쪽을 제외하고 3면 모두 띠살문으로 하였으며 그중 앞쪽과 우측은 들어열개로 했다. 
    이 들어열개 창호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독특한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창호 
    형식이다. 들어열개의 창호의 특징은 한국 건축 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강한 자연동화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들어 열음으로써 외부의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하나로 
    되어 내부공간에 앉아 있지만 결코 내부공간이 아닌 자연속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동춘당의 4분합 들어열개를 모두 접어 들 쇠에 걸면 인공공간은 곧 보다 큰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되어 외부의 자연공간과 일체가 되고 곧 자연인으로 동화가 되는 것이다. 


  
  ▼ 동춘당(同春堂)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년 ~ 
    1672년)이 48세가 되던 해(1653년)에 지은 별당(別堂)으로 대전광역시 송촌동 동춘당 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이 돌아가신 6년 후 1678년(숙종 4년)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건물은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이 세운 것을 송준길이 48세인 1653년(효종 4년)에 헌 목재를 
    그대로 써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동춘당 과 송준길
    한국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써 그 몇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적 심성. 
   둘째, 인간척도를 기준으로 하는 조영사상(造營思想) 
   셋째, 건축물 구성요소의 상징성 표현기법. 
   넷째, 공간의 위계성(位階性) 즉, 공간의 계층적 질서. 
   다섯째는 공간구성의 대칭적 비대칭성이라 할 수 있다. 
   동춘당에서는 이와 같은 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적 요소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 앞에 걸려있는 "同春堂" 현판은 송준길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우암 송시열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인데 동춘당이란 봄(春)과 같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봄은 양(陽)이요 양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편액은 우리나라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편액이 없는 한국건축은 
   생각할 수 없다. 편액이 없으면 건축의 의미가 반감될 뿐만 아니라 이 편액으로 인하여 건축에 
   생명이 있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액이 있으므로 건축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우암은 동춘당뿐만 아니라 주변에 많은 편액과 주련, 시문들을 써 주어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동춘당은 1단의 거친돌 바른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주초석을 놓고 8치각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양봉(梁棒)이 내외로 돌출되어 대들보를 보강하고 그 위에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궁판이 의외로 크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이만한 궁판이면 상하 2단으로 처리하는데 1단만으로 처리한 것이다. 
   특히 동춘당의 건축사적 가치는 구들과 마루가 접합되어 건축되었으면서도 남방적인 지역성
   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고상식(高床式)으로 꾸민점에 있다고 하겠다. 
   이 집의 정면에서 보는 온돌방의 영창(映窓)은 쌍창이다. 창 가운데 문설주를 하나 세워 창이 
   2개가된다. 그래서 '영쌍창'이라 부른다. 창 아래는 머름에 맞추고 옆의 설주와 위의 인방은 
   흙벽과 맞대어 놓았다. 이를 통털어 문얼굴이라 한다. 문얼굴은 그 집의 격조를 나타내고, 
   나아가 집주인의 인품까지도 엿보게 한다. 문얼굴의 나무는 흙색으로, 흙은 나무 색으로 동화
   되어있다. 흩어져 있는 자연을 사람이 모양을 내서 세운 것이다. 문얼굴 아래는 머름이 설치
   되어 있다. 머름이 있으면 출입을 하지 않으므로 문이 아니라 창이 되는 것이다. 
   머름의 높이는 앉아서 팔을 올려놓았을 때 가장 편한 높이로 만든다. 
   그 높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한자 다섯치(1.5尺)에서 한자 여덟치(1.8尺)다. 
   그리고 밖에서 방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내부공간에서의 행위를 될 수 있으면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가장 자연스런 기능과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동춘당의 온돌방에 정좌하여 정면을 바라보면 일각대문이 보이고 풍광이 전개된다. 
   바로 송촌(宋村)의 풍광이다. 그 풍광의 반은 담으로 절제된 안공간(私的空間)이고, 그 반은 
   바깥공간(公的空間)이다. 즉 담 밖의 공간과 담 안의 공간이 동시에 전개된다. 영창의 가운데 
   세워둔 설주는 문으로 풍광을 골라서 볼 수 있도록 그 반을 설정해 두었다. 
   설주를 중심으로 그 반과 다른 반은 전혀 다른 경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창은 가로, 
   세로의 비율이 1:1 비례로 되어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 어느 한쪽을 크게 하지 
   않음으로서 원에 내접하거나 외접해도 딱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와 같은 별당 
   건축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의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접객, 
   독서 한유(閑遊), 관상 등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는 항상 이에 알맞은 경승지를 택하고 
   인공 연당과 축산으로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주택 내에서의 생활 기능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공동 대화의 장소로, 또는 
   사회적,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모든 역할을 행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독서와 강학, 집회소의 기능도 겸비하고 있다. 송준길이 말년에 우인, 제자들과 모여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든 곳도 바로 이곳이다. 좌측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뚫어진 굴뚝은 유학의 은둔적 사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남이 보는 앞에서는 
   편히 놀고,먹고, 자는 행위를 악덕 시 했기에 따뜻하게 불을 지펴 편히 쉬는 것도 
   극히 자제해야 했다. 
   굴뚝이 높으면 불이 잘 지핀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서 
   '따뜻한 온돌방'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는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예학의 종가라 할 정도로 학덕이 높았던 동춘당은 아예 굴뚝을 달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 본뜻이 달라질세라 지금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이 별당건축은 당시 건축술의 정수를 기울여 조영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구이다. 이러한 별당건축으로서 강릉 활래정, 해운정, 월성의 무첨당, 안동의 임청각 
   군자정, 달성의 태고정, 그리고 동춘당과 이웃하고 있는 송애당, 쌍청당, 제월당 등이 있다. 
   모든 건축문화재가 국보이고, 보물이지만 특히 동춘당에 보물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웃에 산재해 있는 유사한 별당건축 중에서도 가장 대표될 만 하기 때문이다. 
   동춘당의 규범적인 건축형식은 주변에 산재한 다른 별당보다도 정갈하고 균제감을 
   보여주고 있다. 
   애써 치장하지 않고 단아한 모습은 동춘당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는 듯 하다. 
    송준길
   * 자(字) : 明甫(명보)
   * 호(號) : 同春堂(동춘당)
   * 년    대 : 1606년(선조39) - 1672년(현종13)
   * 관    직 : 집의, 찬선, 이조참판, 성균관 제주, 병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 증    직 : 영의정
   * 거주지 : 회덕 송촌
   * 유    적 : 동춘당, 동춘고택(송촌동), 옥류각, 초연물외 암각(비래동)
   * 저    서 : 동춘당집, 어록해
   * 묘    소 :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송준길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호는同春堂(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다. 영천군수 송이창의 
   아들이다.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집(서울 정동 구 대법원 청사자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三賢臺(삼현대)라 불렀다. 문묘에 배향 된 삼현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그는 어려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청년기에 송시열·이유태 등과 함께 김장생(동춘의 
   표종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4년(인조2)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163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마에 
   제수되었다. 이후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1633년 동몽교관으로 잠시 
   출사하였으나, 장인 우복 정경세의 죽음이 있자 이를 빌미로 사임하였고, 
   곧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출사할 명분이 없다 하여 향리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만행을 자행하는데 대해 대군 시절부터 강한 
   복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청에 인질로 끌려가서 8년 동안이나 볼모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곳의 지리·정세 등에 밝았으므로, 즉위와 함께 자신의 북벌의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효종은 먼저 조정에서 친정세력을 배제하고 재야의 참신하고 절의있는 인제들을 
   등용하고자 하여 산림을 대거 중용하였으니, 김상헌·김집을 필두로 한 이른 바 산당의 
   출현은 바로 북벌의지의 산물이었다. 
   효종이 즉위한지 한달이 되는 6월 8일, 송준길(전,지평)은 김집(전,승지)·송시열(전,지평)·
   李유태(전,사부)·권시(전,자의) 등 호서의 대표적 유자관인들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서로 뒤를 이어 조정에 들어왔다. 
   효종은 다음 날 처음으로 정사를 보았는데 이때 이들의 대표격인 김집을 발탁하여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 이조가 예부의 관헌은 반드시 문신 중에서 등용해야 한다고 하여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옛것을 상고하고 글을 읽은 사람을 부른 것은 장차 등용하기 
   위해서이니, 상규에 얽매일 것이 아니다"라 하여 그의 산림중용의 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여론을 의식하여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효종은 우선 그를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가, 대사헌을 거쳐 그 해 11월 이조판서에 기용하게 된다. 
   산당의 영수인 김집에 대한 이러한 예우는 곧 그 당여인 송준길·송시열의 지위변화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송준길은 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종3품)에 올랐는데, 
   이때 그는 공신계로서 비난이 높았던 김자점을 탄핵하여 이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밀고하여 청의 조사 사절이 줄을 이어 내려오는 등 
   사태는 급변하게 되자, 송준길은 산당계의 다른 인사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송준길은 집의·이조참의·찬선 등으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퇴하였고, 1658년(효종9) 7월 조정에 다시 들어가 찬선·대사헌·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그해 12월에는 성균관의 제주(정3품)를 겸하게 되었다. 
   1659년 3월에 병조판서에 제수 된 후 대사헌, 우참찬 등을 맡아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송시열과 함께 국정을 이끌면서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당연히 국시로 삼아야 하되 바로 북벌시행은 불가하며, 민생의 안정을 
   이룬 후에 대지를 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민생을 살리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일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국가의 북벌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발발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를 주장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등 
   여러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계의 계속된 상소로 사퇴하였다. 
   이때 1665년(현종6) 원자의 보양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70년 세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나갔으나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2년 동안 회덕 향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672년(현종13) 67세로 타계하였다. 
   1673년 송준길은 현종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인선왕후(효종비) 
   의 죽음을 계기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대두되었고(2차 예송),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설이 서인의 대공설을 누르고 승리하게 됨에 따라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1675(숙종1) 송준길은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작 당하였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으로써 관작이 다시 복구되었다. 
   1681년 회덕의 숭현서원에 배향되었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연산의 돈암서원, 공주의 충현서원 상주 흥암서원 등과 이외에도 많은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고, 1756년(영조32)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동춘당집』,『어록해』
   등이 전하고 있다. 
   송준길은 존심과 인애를 위주로 하면서 예를 돈독하게 실천한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그가 쓴 송준길의 <묘지문>에서 "인애를 주로 삼고 예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논리가 지극히 바르고 은의가 두터워서 후세의 법도가 될 만 하였다." 라 하였고, 
   효종은 "(송준길은) 마음을 잡아 지킴이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이 한쪽으로 편벽 됨이 없다" 
   라 하였다. 송준길은 공자·맹자·주자로 전승되어 온 도통의 학맥을 존숭하였고, 율곡(이이)-
   사계(김장생)-신독재(김집)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의 학문체계에 충실하였다. 
   특히 예학에 주력하여 스승 김장생으로부터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 라는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김장생의 『억예문해』를 검토해 보면, 전체 542개 문항 중 44.3%에 해당하는 
   무려 240개 문항에 대한 문례가 송준길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문례의 
   내용이 매우 수준 높은 것인 점으로 보아 예학적 수준을 감지할 수 있다. 
   훗날 현상윤은 "(송준길의) 학문은 송시열과 경향을 같이 하여 주서와 심경과 근사록 등서에 
   치력하였으나, 그의 가장 득의처는 예학이었다." 라고 평하였다. 
   송준길이 예학에 주력하게 된 것은 그의 학통적 배경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무너진 정치·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윤리질서의 재건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는 시대인식과 
   직결된 것이었고, 산림으로서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책임의식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형식적인 예행을 경계하고, 의식적인예행을 중시하였다. 
   그가 "하늘을 섬기고 신을 섬기는 도리는 제물의 크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볼뿐이다. 라 한 데에서도, 예를 통하여 의리를 진작시키고자 했음을 
   주지케 된다. 이러한 그의 의리위주의 입장은 비단 제사 예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의 
   모든 면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그의 성리학적 철학사상이 바탕하고 있었다.  
   송준길은 주자가 공맹의 도통을 잇고 그것을 세상에 새롭게 밝힌 성인이며, 따라서 정학을 
   공부하는데는 주자를 존심함이 으뜸이라고 인식하였다. 그것은 당시 유자들이 대체적인 
   통념이었고, 그의 학문과 사문의 전통적 학풍이었으며, 청의 무력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된 조선의 
   실상과 그 극복에의 의지가 남송대 주자의 극복의지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부자가 후학에게 가르친 아름다운 뜻을 내 지금 봉행하리라" 하였던 것이다. 
   송준길은 대체로 주자·율곡의 성리설을 견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의 理氣說을 계승하여 
   그것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이의 설을 그대로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理氣說에서 理의 일차적인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이이의 理氣說과는 것으로 오히려 이황의 그것에 더 가까운 理氣論이라 할 수 있다. 
   또 심성론에서도 心을 핵심적인 논거로 삼아, 心의 未發은 性이고, 已發은 情이며, 心이 발한 후에 
   그것에 관해서 경영하고 상량하는 것이 意라고 보고, 그 상관관계를 심통리기설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또한 이이의 심통기설과 다른 측면이 보이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에 있어서도 
   그는 "心은 허영지각한 것으로 理와 氣를 합하여 이름한 것이다. 혈기에서 나온 것을 일컬어
    人心이라 하고 의리에서 나온 것을 일컬어 道心이라 한다"라 했다.  
   송준길은 敬(경)을 수양의 가장 중요한 규준으로 삼고, 또 가치의 근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경을 강조하였다. 주경의 목적은 인욕을 억제하여 천리를 보존케 하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여 인륜도리를 밝히고 이것을 잘 지켜나가게 하는 수양의 요체였으며, 
   동시에 "天理를 보존하는 일은 사직을 편안히 하는 所以(소이)가 된다" 라 한 바와 같이 사회와 
   국가를 안정케 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안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천리와 인욕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義와 不義, 正과 邪(사), 中華(중화)와 夷狄(이적), 
   正道와 邪說(사설)을 밝혀 義와 正과 中華와 正道를 쫓는 것이 天理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고 
   또한 춘추대의를 확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현실 정치에 있어서도, 
   불의를 응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공신계로서 권세를 휘두르고 청에 아첨하던 김자점 등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고, 사육신의 절의를 존숭하여 박팽년 등을 위한 사당의 건립을 건의하였으며, 
   또한 효종의 북벌계획에 동참하여 그 추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이러한 송준길의 의지와 노력을 일러 "스스로 존주의리를 지키고 (청에 대해) 복수할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라고 평하였고, 태학박사 황경원은 "선왕이 밤낮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한결같이 인의에 근거하여 오로지 북벌에만 힘을 쏟고 그 뜻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송준길의 힘이었다"고 말하였다. 북벌운동에서의 송준길의 위상을 가히 알 수 있다 
   하겠다. 동종인 송시열과 학문경향은 물론 정치적 출처를 함께 하여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양송으로 
   칭하였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곳곳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는데, 동암서원 묘정비·
   숭현서원비·박팽년 유허비 등 많은 유품을 남겼으며 저서에 『동춘당집』·『어록해』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고 유적은 동춘당과 동춘당고택(송촌동), 옥류각(비래동)이 있으며, 
   묘는 원정동에 있다.  


  
  ▼ 동춘선생 고택(同春先生 古宅)  시 유형문화재 제3호 
    
    별당인 동춘당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춘당을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넓게 트여 있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2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별당인 동춘당이 앞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마당이 넉넉한 사랑채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기호지방의 넓은 지형조건을 닮았는지 
    이 지방의 사대부 가옥은 대개가 이처럼 배치 구조에 여유가 있다. 기호학파의 학맥이 
    이곳에서 꽃을 피웠으니 어찌 보면 기호학의 종가라 해도 될 것이다. 배치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영남지방의 사대부 가옥과는 달리 옹색하지가 않다. 
    텃밭도 널찍하고 뒷담도 널찍하다. 동춘당 주인 송준길은 이 텃밭에 손수 농사를 지음으로서 
    자연의 섭리와 농군의 심성을 헤아렸을 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대청이 놓이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배치되고 좌측 1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이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내외가 분명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반드시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구별해두고 그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이러한 법도가 지켜져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치고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공간의 내외질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내외담이 없었고 사랑채 뒤에 
    반침이 있어 내외담 역할을 하였는데 습해서 썩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나니 안채와 직통으로 
    통하여 할 수 없이 격담을 하였다고 한다. 
    정면 여섯 칸의 사랑채로는 동춘선생의 명성으로 보아 너무 작다. 
    더구나 행랑채가 없다면 말이다. 사랑채에서 대청, 중문칸, 아궁이 함실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세 칸의 방밖에 남지 않는다. 사랑채에서 할 일을 별당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사랑채면 보통의 사대부 가옥에도 못 미친다. 사랑채로서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랑채의 모습으로 인하여 송준길선생의 유가적(儒家的) 행적을 알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은 그를 일러 "천품(天品)이 절이(絶異)하고 정명온수(精明溫粹)하며 
    형철무하(瑩徹無瑕)하고 색이기화(色夷氣和)하여 보는 사람마다 심취케 한다"고 평했다. 
    동춘 선생의 지위로 보아 사랑채 앞쪽, 대문 옆으로 행랑채가 있을 법한데도 없다. 
    이 댁의 노복들은 어디에 거주했고 주인 행차에 따라온 노복들은 어디에 여장을 풀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다. 안채를 ' '자 모양으로 
    둘러 앉히고 그 가운데 마당을 둠으로서 소위 '중정식 주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뜰 집'이다. 이 마당은 우리와 같은 유교권에서 여성의 내향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안마당은 외부이면서 내부이고, 내부인 듯 하면서도 외부가 되는 것이다. 
    즉 안채의 기능이 안마당으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외부가 하나의 기능으로 통합이 된다. 
    가령 안마당에 천막을 치게되면 완벽한 내부공간이 되기도 한다. 
    영남지방의 안마당에 비해 이 지방의 안마당은 널찍하고 여유가 있다. 
    지리적 환경이 그 원인인 듯 하고, 한편으로 기호학파 학맥의 전통에도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이 안채는'ㄷ'자형 평면이며 3칸으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고 안방 뒤로는 
    골방이, 앞으로는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을 겸하여 동측으로는 안쪽에 건넌방, 부엌, 
    행랑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안주인이 기거하며 집안의 큰 일을 돌보는 곳이다.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강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도덕적 규범을 터득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채의 크기는 사랑채보다 훨씬 크다. 사랑채가 최소한의 기능만을 공간화 했다면 
    안채 역시 최소한의 기능을 공간화 하였다고 하겠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의 크기는 대개 이만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크다. 달리 말해 사랑채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집사치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대부가의 안채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바탕에 깔아둔 것 같다. 
    안마당이 넓음으로 안채를 특별히 사랑채보다 높이지 않아도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 좋다. 
    안대청에는 사분합을 달아 추운 기후에 대비토록 하였고 각 방의 기능을 연결하기 위해 
    마당 쪽으로는 좁은 퇴를 달아 연결시켜 놓았다. 
    한편 이 안대청 사분합은 들어열개로 되어 이를 들어올리면 안마당과 안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전용(專用)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집에는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별묘(別廟)로서 동춘선생의 신위를 모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묘(家廟)로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둘 다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앞쪽에 퇴칸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묘(祠廟)는 반드시 구역 내에서 약간 뒤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배치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규범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묘는 혈족을 중심으로 동족선조를 
    봉사(奉祀)하는 보본(報本)의 본능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혈족의 차원을 벗어날 때 문묘, 종묘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사묘(祠廟)는 유교권에서 현저히 발전되어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 공간은 선조에 대한 경애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경(敬)의 공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공간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동춘선생의 별묘는 그의 학덕을 길이 숭앙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다. 
    이렇듯 별묘는 국가에서 공신의 위패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한 것이기에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사묘에 한해 조정에서는 격조 높은 두리기둥과 단청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기둥에다 
    단청도 하지 않아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이러한 별묘는 이외에도 몇몇 사대부가에 설치되어 있다. 
    동춘당과 고택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자태와 같이 단아하며 품위가 있다. 
    여느 지방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요란함과 호화로움이 없고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는 검소함이며,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의 심성은 곧 기호학 맥의 본연인 듯 싶다. 
    이와 같이 이 지방의 사대부 집에 나타난 선비의 생각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으며 이 집에서 
    다시 기호학파의 큰 줄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속의 집, 집 속에 자연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며 특히 이 고택에서는 
    입지조건이 옹색하지 않고, 건물의 배치가 여유로워 안마당이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근접을 피한 별당의 배치 등에서 기호지방의 반가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 송용억 가옥(宋容億 家屋)  시 민속자료 제2호 
 『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이곳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안채와 큰사랑채·작은사랑채,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다. 큰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안채 앞에 위치한 작은사랑채는 오른쪽 끝에 툇마루를 한단 높게 두어 운치를 살렸다. 
   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다. 
   최근 대청에 유리덧문을 달아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구릉 위에 가묘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가 2동이나 있어 사랑채의 기능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개방적인 배치를 하고 있어 기호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 큰 사랑채는 송병하의 아들로 광주목사를 지낸 송요화가 짓고 자호를 따서 소대헌(小大軒)이라 하였다. 
   소대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각실의 꾸밈새나 구조기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건축으로 보인다. 


  
  ▼ 작은 사랑채는 송요화의 아들로 보은현감을 지낸 송익흠이 짓고 자호를 따서 오숙재(吾宿齋)라 하였다. 
    이 집은 정면 8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 뒷들과 안채 
    이 주택의 안채는 개수로 인하여 원형을 많이 상실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특징으로 보면 오히려 
    이 주택 내에서 다른 건물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가옥의 배치구조는 폐쇄적인 영남지방의 그것과는 달리 개방적이다. 2동의 사랑채는 횡으로 
    병렬 배치되어 더욱 큰 개방감을 주고 있다. 
    사랑채가 2동인 것은 사랑채의 기능을 확대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사랑채의 기능이 커진 것은 
    이 가옥이 지역의 문화적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기호지방 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 문화재이다. 


  
  ▼ 고인돌은 송촌굴다리를 지나 당산나무 앞쪽에 있다는데 ... 


  
  ▼ 비래동 고인돌 (比來洞 支石墓) 기념물 33호 
    비래동 비래골 마을회관 앞 논 가운데 위치하며 모두 3기이나 2기만 지정되었다. 
    1호 고인돌은 780x440㎝정도의 범위에 걸쳐 잡석 및 황갈색 점토를 약 0.5~1m 가량 높이로 쌓아 
    올린 뒤 매장 주체부인 석곽을 축조하였다. 석곽 바닥에는 10~20㎝ 크기의 얇은 판석을 깔아 
    놓았으며 크기는 230x140㎝ 가량 되는데 양쪽 끝은 후에 무너졌다. 
    이 고인돌에서는 비파형 동검 1점과 삼각만입형 석촉 3점, 홍도 1점이 출토되었다. 
    2호 고인돌은 1호와 약 5m정도 떨어져 있는데 많이 훼손되어 출토유물은 홍도파편 뿐이다. 
    상석은 약 290x260x45㎝의 크기이며, 16개의 성혈(性穴)이 나 있다. 
    축조 방식으로는 1호 고인돌과 같이 봉분(封墳)형태의 둥근 성토부(盛土部)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뚜껑돌을 무덤위로 보다 쉽게 가져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래동 고인돌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은 금강 유역에서는 최초의 예이며, 함께 나온 석촉 등의 
    형식으로 보아 축조시기는 약 B.C7~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폭포와 옥류각 암각(초연물외) 이 함께 보이는 풍경 
    옥류각으로 들어서는 왼쪽의 암벽 아래 부분에 동촌선생의 친필로 '초연물외(超然物外)'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위'는 불가(佛家)에서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생멸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환경과 자연환경이 우리 건축을 형성해온 배경이 되었다. 
    이 옥류각은 동춘선생의 사후에도 그의 문인들이 선생의 유덕을 경모하는 곳으로 계속 소중히 
    여겨왔다 


  
  ▼ 조선 숙종때 예조판서였던 제월당 송규렴(霽月堂宋奎濂:1630~1709)선생등이 숙종19년(1693)에 
    동춘 송준길 선생이 강학하던 곳을 기념하여 세운 누각이다. 
    송준길이 읊은 시 가운데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 같은 물방울(玉溜)”이란 시구(詩句)를 따서 건물 
    이름으로 삼았다. 
    건물의 크기는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렸고, 2층 왼족(동쪽)에 드린 방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게 하였다.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1657~1732)가 지은 샹량문이 있다.
    
    건물을 세우기 쉬운 평지에 만들지 않고 왜 물이 흐르는 울퉁불퉁한 계곡 위에 세웠을까. 
    흔히 한국 건축은 자연과 잘 어울리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의미를 
    바로 이 옥류각이 극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자연 경관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건물이 앉을 자리만 다듬어 세워 두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러한 건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과의 조화라는 의미로 볼 때 중국이나 일본의 자연관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중국에서 건축과 자연의 어울림은 강남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남쪽지방인 강소성 소주에 가면 유명한 사대부 주택이 많이 남아있으니 졸종원(拙政園), 
    유원(留園), 사자림(獅子林) 등이 대표적인 사대부 주택이다. 그곳에는 주택과 정원 두고 있다. 
    이 정원에는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연못, 섬, 계곡, 수로, 산, 언덕, 다리, 정자, 
    나무 등 인위적인 것이 아닌 게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정원이 마치 자연스럽게 생긴 것과 진배없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원에는 시간개념도 들어있다. 즉, 정원을 구획하여 각 구획마다 주제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붙인다. 겨울 정원에 들어가면 여름에 보아도 겨울을 느끼게 하고, 여름정원에 
    들어가면, 겨울에 가도 여름을 느끼게 한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주는 중국 건축의 
    자연관이다. 일본 교토에 대덕사(大德寺) 대선원(大仙院) 내에는 자연현상을 가장 함축하여 
    표현해 둔 정원이 있다. 연못의 섬은 곡선이 많은 수석 몇 개를 놓음으로서 대신하고, 
    연못의 물은 작은 돌멩이를 깔고 파도문양을 그어 놓는다. 서로 색깔이 다른 자갈을 문양에 
    따라 깔기도 한다. 이 작은 돌멩이는 바다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무는 극히 성장을 억제하여 바위에 심어둔다. 넣는 방법과 색깔, 심는 방향과 종류에 따라 
    음과 양을 상징하고, 오행을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한눈에 보아도 인위적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연현상을 표현하되 가장 함축된 기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 건축의 자연관에 비해 우리의 자연관은 어떤가?. 우리는 자연의 현상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자연에 인간의 심성을 포함시키려는 것이다. 
    옥류각이 자연스런 계곡, 생긴 그대로의 경관, 나무 한 그루도 해치지 않고 경관 속에 
    비집고 들어가 집을 짓는 것에서 우리 건축의 자연관을 읽을 수 있다.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집속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개념이 우리 건축의 자연관이다. 
    옥류각의 구조를 살펴보자. 높이가 다른 주초석을 유수(流水)암반에 줄을 맞춰 놓고 
    그 위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다. 마루바닥을 중심으로 아래는 두리기둥, 
    위에는 방형 모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서는 창방과 대들보를 '十'자로 맞춰 끼웠다. 
    이를 사개맞춤이라 한다. 이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양봉(樑棒)은 안쪽에서는 경사지게 
    하고 밖으로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모습을 하고있다. 
    창방 밑에는 창방 받침을 하나 더 대어서 보강해 주었다.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짜고 
    사방에 난간 대신 머름을 대었다. 
    방과 마루 사이는 띠살문 4분합 들어열개를 달았다. 그 외 다른 쪽의 문은 모두 2분합 
    여닫이문을 달았다. 누가 그려 걸었는지 방 앞에 달마상이 있다. 
    측면 가운데 기둥과 대들보 사이는 충량을 걸었는데 충량 위의 서까래가 모이는 
    합각부분에는 우물천정을 하였고 그 외 다른 부분은 모두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정으로 하였다. 대들보 위에 종보를 얹고 동자기둥대신에 파련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쳤다. 이 옥류각은 한국건축에서 흔치않은 측면 출입으로 되어있다. 
    비교적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누각건축인 때문인 듯 싶다. 옥류각 4면에는 동춘당, 
    제월당, 삼연(三淵), 도암(陶庵)의 명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인간이 만든 건축과 자연이 만든 경관이 한데 어울려 아주 훌륭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옥류각을 바라보면 마치 '자연 속에 집'이 있는 것 같고 이 옥류각을 들어서면 또한 
    '집 속에 자연'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갖게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와 같이 집은 
    자연처럼, 자연은 집처럼 여겼던 것이다.
  

  
   ※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다는 생각되지 
     않는 구간에서 많은 문화재를 접하면서 
     회덕은 덕을 품은 청풍명월의 고장이고 
     송촌은 삼강여의 선비촌 임을 새삼 느끼면서 
     강산이 3번이나 변하는 세월을 이고장에서 
     살았음에도 이고장 문화를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에  이번 문화재 답사는 잘한 일이란 
     생각이 됩니다    
     걷기운동 삼아 한번쯤 걸어보며 옛 선비들의 
     자취를 느껴 봄도 괜찬은 것이 아닌가 권해
     봅니다 
     인터넷 속성상 이렇게 장황한 글을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분이라도 
     있다면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 되고 끝까지 
     읽어 주심에 많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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