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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지리산 이야기 (1편) 피아골-노고단-화엄골


     
   ♡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라.   
     분노와 격정과 같은 격렬한감정의 혼란을 피하고.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섭취하는 음식물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 건강하면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길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수 없다".  
                  [쑈팬하우어의 '희망에 대하여' 중에서].
     굳이 쑈팬하우어의 말을 인용하지 않터라도 건강의 중요함은 다 아는 사실이며 다만 스스로의 단련을 실천하지 
      못함으로 건강과 멀어 지는 것이라 생활의 리듬을 바꾸어 꾸준히.몸과 마음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몫이 개개인에게 남아 있다.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것! 자신부터 실천에 옮겨야 될것임을 
      자각 하고 단련을 시작한 바 있다. 우선은 지리산 종주를 감당할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을 단련 목표로 삼았고 
      그 완성도를 측정하고자 지리산종주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마침 지리산의 피아골-노고단-화엄골로 내려오는 
      직장 산악회의 등산이 있어  친구들을 대동하고 지리산 종주 산행의 예행연습 삼아 따라 나선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삼거리
 까지 6km(3시간50분) 또 노고
 단까지 3.2km(1시간30분)
 노고단에서 화엄사까지 7km
 (3시간) 총연장이 약17km 에
 8시간20분 걸리는 싶지 않은 
 산행이 틀림 없는데 어떻게 
 선뜻 나선것인지? 나도 알수
 없다 친구따라 강남 가는 것?
 서대전에서 0:47분에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하여 구래구
 역에는 새벽 03:30 경에 도착
 한다 피아골의 출발지 직전마을
 까지 차편은 새벽이라 택시 
 밖에 없고 흥정하여 구례 시가
 를 빠져 연곡사를 지나 산행
 들머리로 간다 
  

  
   ▼ 택시는 03:55분에 구례군 토지면 직전(稷田)마을에 우리 일행을 내려 놓고 어둠으로 사라지고 헤드랜튼에 불을 
     켜고 04:00 정각에 산행이 시작된다  옛말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이거 너무 일찍 
     등산하는 거 아닌가?  집에서 잠 안재우고 일 시켰다면 죽어도 못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쳤겠지?... 
   
     ※ 피아골 설명 (한국의 산하 인용)
   [임걸령에서 연곡사에 이르는 32㎞에 걸친 깊고 푸른 골짜기로 광활한 원시림과 맑은 물, 삼홍소(三紅沼)를 
   비롯한 담소(潭沼)·폭포 등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피아골이란 이름은 6·25전쟁 뒤에 그 이름을 딴 반공영화가 
   나옴으로써 흔히 전쟁 때 빨치산과 이를 토벌하던 국군·경찰이 많이 죽어 '피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옛날 이곳에 곡식의 하나인 피를 가꾸던 밭이 있어 '피밭골'이라 했는데 후에 그 이름이 피아골로 
   바뀐 것이다. (稷田 : 기장 직으로 피밭이란 뜻) 일대는 각종 식물이 능선별로 분포하며, 특히 울창한 활엽수의 
   가을단풍이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산과 계곡, 사람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 삼홍(三紅)이라 하며, 
   홍류동(紅流洞) 이라고도 한다.]
   ▼ 올라오는 동안 그렇게 경치가 뛰어나다는 삼흥소 구계포계곡 형제폭포는 어둠에 쌓여 구경도 못하고 이정표만 
     보고 지난다      

     
   ▼ 젊은 사람은 젊어 잘하고 여직원들은 좀 못해야 정상인데 그렇치가 않고 너무 잘한다 그러니 찍 소리 못하고 
     꽁무니 따라서 열심히 오른다  속된표현으로 사타구니 요령소리가 나도록 걸었다. 드디어 피아골 대피소에 도착. 
     대피소 솟대가 우릴 반긴다  


  
   ▼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 보통 2시간 거리인데 ...그렇게 열심히 올랐으니 약30분 정도 단축되였다는 
     이야기 여기서 간단히 쉬고 다시 오른다 이제 부터 임걸령으로 오르는 본격 오르막 구간 또약 2시간 걸린다고 ...  
     대피소 앞 마당을 통과 오르기 시작한다  


  
   ▼ 다리도 건너고 시간이 지나니 이제 여명이 트이고 아침이다 숲속으로 햇살이 뚫고 온다 


  
   ▼ 임걸령까지는 가파른 오르막 길에 나무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힘들어 깔딱가는 고개다 


  
  ▼ 피아골... 올려다 보니 능선의 봉우리... 내려다 보니 계곡을 이루는 산과 골짜기에 쬐이는 아침햇빛. 청량한 
    빛을 보니 마음에 드리운 그늘도 거치는 듯 상쾌하다. 

  
  ▼ 우~  다 올라왔다 여기가 
   종주등반을 하는 지리산 등어리
   의 한 곳 - 피아골 삼거리 이다
   대피소를 05:47분에 출발
   피아골 삼거리에 07:25분에 
   도착하였으니 약1시간40분
   걸렸다 보통 1시간 50분 거리
   보통의 등반시간과 거의 맞추었다 
   아침을 임걸령 샘터에서 한다고
   노고단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빽해서 간다 
   

  
  ▼ 여기가 임걸령 샘터 많은 등산객의 휴식터 물맛도 좋고 수량이 풍부하다 

  
  ▼ 우리도 물을 받아 목을 축이고 싸가지고 온 아침을 한다   주변경치도 빼어 나다  


  
  ▼ 능선의 남쪽으로는  샘터앞의 한그루 소나무와 어우러진 왕시루능선과 왕시루봉 북쪽으로 는 만복대와 
    이어진 능선들이 전망된다   

  
  ▼ 아침도 끝났고 슬슬 출발한다
   이제 능선을 타고 산 허리 숲속을 
   가르며 노고단까지 이어진 편한 
   길이다. 
   녹색물결과 맑은 공기는 회색빛
   도시의 찌든 일상으로 탈출이며 
   그로인한 해방감. 호연지기를 
   일깨워 주는 듯 하다. 애를쓰면 
   애쓴 만큼의 땀이 흐르고, 
   그만큼의 깨달음과 감흥을 주기에 
   산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시켜 주는가 보다
   

  
  ▼ 돼지령 쯤 왔나 내려본 골짜기와 능선 (형제능선인가 왕시루능선인가 알수없다 ) 능선과 골짜기 사방천지가 
    녹색으로 물들어 있고 첩첩이 산으로 둘러져 있다           


  
  ▼ 고지대라 철죽이 지금피고 있다  조금 널찍한 장소에서 쉬어간다 

  
  ▼ 노고단을 향하여 능선길을 쭉 따라가면 오른쪽에 하얀머리를 가진 위엄있는 산이 하나 보인다 이름하여 '만복대' 
    여기서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바둑동호회 시인이 한 분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어 추모하는 의미로 정감 넘치는 
    그분의 시를 소개 합니다   
     
   ▼ 저 만치 노고단의 국립공원 초소가 보인다 노고단에서 중주산행의 첫 걸음은 바로 저 곳에서 부터~!!  
     노고단 정상으로 사용하는 돌탑 실제 노고단 정상은 휴식년으로 통행이 통제되어 오를수 없다 

 
  ▼ 노고단 정상(1507m) 지리산
   종주계획중인 세사람 한컷 한다
   노고단(老姑壇)은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는 산으로 지리산의
   한 봉우리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넓은 초원
   으로 구성된 약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로 신라시대 때부터 제사 
   지내던 제단이 있다.
   보통 노고단부터 천왕봉까지의 
   구간을 이르는 지리산 종주코스의 
   시발점으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노고단 대피소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노고단 일대의 운해가 멋있다 하여 
   이 노고운해를 지리십경의 하나에 
   포함시킨다.
   

  
  ▼  노고단을 임도로 내려간다 노고단 안테나 
    노고단 대피소 시설이 제법 현대화 되어 있었다. 성삼재에서 약 한시간 정도에 위치 하므로 성삼재에서 가볍게 
    올라와 하룻밤을 유하고 가까이는 반야봉까지 갈수 있고  멀리는 세석까지도 가능할것 같다  화엄사에서 
    시작하는 초보 종주는  여기서 묵어 가면 좋을것 같다   


  
  ▼ 노고단 대피소를 조금내려 오면 코재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에서 조망한다 올라 왔으면 어김없이 또 가야하는길 
   그길을 한번 내려다 보자 저밑 산자락 끝 뿌였게 보이는 것이 화엄사. 그뒤로 구래군 마산면 소재지가 있군. 
   화엄계곡이 참 길어 보인다.    조금 밑으로 종석대가 보이고             


  
  ▼ 화엄계곡은 여기서 시작한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 km 
   올라 올때는 4시간 내려 갈때는
   3시간으로 표시 되어 있다 
   이제 내려막 길이니 한층 힘이
   덜 들어 갈것으로 기대하며 
   내려 간다 
   

  
  ▼ 눈썹바위 눈썹처럼 길게 옆으로 누워서 눈썹바위인가? 아 하고 금방 감이 오지는 않는다 


  
  ▼ 화엄계곡의 길은 전부 돌길이다  길옆 폭포와 경치도 좋치만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길이 분명하다  


  
  ▼ 집선대 다리 힘이 점점 빠져 발끝에 힘을 주어야 하지만 그냥 이정표만 보고 내려간다 


  
  ▼ 참샘터 여기 까지는 돌길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내려가는 것은 평평한 흙길을 기대 함이다 내려오는 길은 그런길이 
    편하기 때문이 겠지  이제 슬슬 지루하다는 생각이... 


  
  ▼ 등산에는 내로라 하는 두사람도 다리를 주무르고 식히고 하는 것을 보니 참 힘던 계곡길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참 지루하다  


  
  ▼ 화엄계곡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돌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려가는 길이 더 힘던다 한다 오르막보다 뭐가 더 힘던다 
    할까? 나는 반대였는데 여기 화엄계곡길에서 실감한다 지금껏 오르는데 힘이 다 빠진 상태인데 돌길이라 발끝에 
    힘을주지않으면 돌에 걸려서 내려가지 못한다   연기암입구 소나무밭의 멋진 노송들 


  
  ▼ 그 지루하던 화엄계곡도 그의 끝나가는 것 같다 이제 제법 평탄한 길이나온다  (어진교)


  
  ▼ 드디어 계곡의 끝 화엄사에 도착 이제 천년고찰의 내력을 알아 보자
                華  嚴   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 인도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
〈동국여지승람〉에는 시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구례속지 求禮續誌〉에 의하면 543년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백제 법왕이 3,000
 명의 승려를 머물게 했으며 642년(선덕여왕 11)에 자장율사가 건물을 중수했다고 하는데, 
 신라승이 백제지역에 있는 절을 중건했다는 사실은 의심스럽다. 
 한편 〈봉성지 鳳城誌〉에는 670년(문무왕 10) 의상법사가 왕명을 받아 3층의 장륙전(丈六殿)
 을 건립하고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石經)으로 장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원본사십화엄경 貞元本四十華嚴經〉은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장륙전이 건립될 당시에 석경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화엄사의 창건이나 창건주,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754년
 (경덕왕 13) 황룡사(皇龍寺)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졌으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2자를 따온 것이다. 
 그뒤 신라말 이곳에서 출가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고려 광종대에는 
 홍경선사(洪慶禪師)가 당우와 암자를 중축했으며, 문종대에는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사고
 (寺庫) 2채를 일주문 밖에 건립했다. 인종대에는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중수했으며, 
 충숙왕대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1424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때 장륙전의 벽을 장식했던 석경도 
 파손되어 지금은 각황전(覺皇殿)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1630년(인조 8)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완공되었다. 
 1702년(숙종 28) 벽암선사의 제자였던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고 다음해에 삼존불과
 보살상 4구를 완성하고는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숙종이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동서5층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절은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펼쳐나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경내에는 17세기 이후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각황전(국보 제67호)
 을 비롯하여 대웅전(보물 제299호)·영산전·나한전·원통전·명부전·적조당(寂照堂)·노전
 (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4사자3층석탑(국보 제35호),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 석경,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노주(露柱)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선조가 벽암선사에게 
 하사한 교지(敎旨)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1매,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 인조하사 
 어석(御席) 1건 및 가사(袈裟) 1령,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하사 
 서산대사 발우(鉢盂) 1좌 및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 1매 등이 있다.
     화엄사각황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국보 제67호.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봉안했으며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건물의 일부가 약간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조 기단 위에 서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여 있다.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多包系)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어 
 있다.  첨차는 아랫면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쇠서의 끝이 모두 위로 올라가 활처럼 생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 목조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층 앞면에는 빗살무늬와 솟을살
 무늬로 장식된 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다. 2층은 사방에 모두 작은 
 창을 달았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공간이 넓으며 고주(高柱)를 사방에 배치하고 그 위에
 대들보로 종량(宗樑)의 한쪽 끝을 받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중앙의 뒤쪽으로는 대불단 위에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
 (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 문수보살·관음보살·지적보살(知積菩薩)이 있다. 
 이 불상·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도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703년(숙종 29)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단 밑에는 임진왜란 때 파손된 1,500여 
 점의 석경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사각황전앞석등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2호. 높이 636cm. 기단부·화사석
 (火舍石)· 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팔각석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위에는 귀꽃이 장식된 8엽의 복련
 (覆蓮)을 돌렸으며 연화대 위에는 다시 구름무늬와 8각 굄이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고복형
 (鼓腹形)으로 전형적인 팔각석등과는 약간 다르며, 배가 볼록하게 나온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는데 그 위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실상사석등·선림원지석등·임실용암리석등 개선사지석등(891) 등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상대석의 밑에는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위에는 8각의 소로형 굄이 있다. 
 화사석은 4면에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다른 면에는 아무런  장식문양도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각 모서리에는 직립한 귀꽃 장식이 크게 표현되었으며 추녀는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높은 노반(露盤), 앙화(仰花), 보륜(寶輪), 귀꽃이 장식된 
 보개(寶蓋)를 차례로 얹고 정상에는 다른 석탑과 마찬가지로 높은 간주가 달린 보주(寶珠)
 로 장식했다. 
 이 석등은 기단보다 상륜부가 크고 폭이 넓어 비례가 맞지 않고 조각수법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장중함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사대웅전
화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牛舌] 
끝이 잘려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차[山彌遮]는 초화형(草花形)으로 장식되는 
등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에는 정자무늬와 빗살무늬로 된 삼분합(三分閤)
이 달려 있으며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두어 건물이 높은 편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외둘레간보다 한층 높게 만들었다. 불단 뒷면과 좌우에는 각각 2, 3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1757년
(영조 33)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이 불상 위로는 각각 J자 형의 처마로 된 정교하고 
장식적인 닫집이 있다.
    화엄사동5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 보물 제132호. 높이 640cm. 대웅전의 
높은 석조 기단 밑에 2개의 석탑이 동·서로 서 있는데, 양식과 조각수법이 다르고 서로 마주
보며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아 원래 쌍탑으로 건립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으로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없다는 것이 서탑과 가장 다른 점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석재로 짜여 있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된 하대석을 올려놓았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조각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덮었는데, 밑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약간 경사가 지면서 중앙에 1단의 각형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졌으며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만 표현했다. 특히 1층 
옥신석은 높고 넓은 편이나 2층 옥신부터는 옥개석과 함께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4단으로 낙수면이 편평하며 추녀 밑도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으나 높은 간주(竿柱) 위에 놓인 보주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탑의 바로 앞 남쪽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과 불안정한 체감비율, 간략화된 형태 등에 의해서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보기 드문 5층석탑의 한 예로서 중요하다.
    화엄사서5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 보물 제133호. 높이 640cm. 2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데 기단과 탑신부 표면에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하층기단의 하대석과 중석은 같은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와 2개의 탱주를 새긴 다음 각기 방위에 따라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안상 안에 3구씩 조각했다. 이와 같이 하층기단에 십이지상이 조각된 예는 원원사지동·
서3층석탑이나 안동 임하동 3층석탑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에서 가끔 볼 수 있다. 하층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윗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의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높은 
편으로 4매의 돌로 짜여 있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조각했다. 상층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밑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굄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으며 
옥신석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신체가 장대하나 양감이 줄어들면서 갑옷의 띠주름이 굵어지는 등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이며, 낙수면이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추녀 밑은 수평으로 처리되었다. 상륜부에는 동탑과 마찬가지로 
노반·복발 위에 간주가 달린 보주가 있으나 후보된 것이다. 석탑의 남쪽에는 배례석이 있는데 
측면에 안상, 윗면에 연화가 조각되어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고준하면서도 비교적 알맞은
 체감비율, 옥개석의 반전, 기단과 탑신에 장식된 조각상이 투박하면서 간략화된 것 등으로 
보아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사사자3층석탑
화엄사 각황전 서남쪽의 효대(孝臺)라 고 부르는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신라시대 3층석탑. 국보 
제35호. 높이 550cm.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없다. 이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나 상층기단이 특이하게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이형석탑(異形石塔)에 속한다. 지대석 위에는 3단의 높은 굄이 하층기단
을 받치고 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를 조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3구씩 배치했다. 안상 
안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조각했는데,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연화대좌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지물(持物)도 각기 다르다. 상층기단에는 암수 
2쌍의 사자를 네 모퉁이에 각각 배치하고 머리 위에 연화대를 얹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합장하고 서 있는 승상(僧像)은 머리로 탑신을 받치지는 않았으나 그 위에 연화무늬
를 조각하여 천개를 표현했다. 석사자상은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각각 표정이 달라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라고 하며 이 석탑 바로 앞에 있는 석등 아래쪽에 꿇어
앉아 있는 승상은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을 받들고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얹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상층기단 갑석은 윗면에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2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졌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장식된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사천왕상·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2, 3층의 옥신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으로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 끝부분에서 예리하게 반전되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의 각 층 윗면에는 
2단의 굄을 두어 옥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알맞은 
체감비율과 옥개석의 경쾌한 반전, 우주 대신 4마리의 사자를 사방에 배치한 점, 하층기단 및 
1층 옥신의 뛰어난 조각수법 등에 의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석탑 형식은 고려시대의 사자빈신사지석탑(1022)을 비롯하여 
홍천물걸리4사자석탑 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제작되었다.
        金理那 글  
  
     
   ▼ 화엄사 대웅전, 각황전, 당간지주, 제2정문, 효대시비, 화엄사 다리

  
  ▼ 10시간의 강행군 산행은 
   직장에 계시는 분들로 무리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너무 잘하
   시고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함께해준 철도공사 직장동료
   분 들에게 감사드리며 같이한
   친구들 고맙고 힘들었지만 
   완주한 지금은 홀가분 합니다 
   어둠에 묻히 보지 못했던   
   피아골을 맑은날에 보려 
   뱀사골 피아골 구간을 가을에
   한번더 와야 겠다는 생각이 
   끝나고 나는 것은 무슨 조화
   일까?
   

  
  ▼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 국림공원 화엄사 분소 사무실 여기서도 버스 타는곳은 2km 나 더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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