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정묵연회

글씨체 해서(楷書)




해서(楷書)
    후한(後漢) 말기 때 초보적인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해서(楷書)는 남북조시대(南北朝 時代)
    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당(唐) 대에 비로소 완성된 서체(書體)이다.
    예서와 초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용필(用筆)이 법도에 맞고, 단정하며 본보기가 되는 모범
    자체(字體)라 하여 정서(正書), 진서(眞書) 라고 하며, 초창기에는 해예(楷隸)또는 금에
    (今隸)라고 하였다.
    ​ 북조(北朝)의 위(魏)나라 서체(書體)로 종료(鐘繇)라는 사람이 창시하였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등에 창작되어 당(唐) 초기에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褚遂良) 등에 의해 완성되어, 당(唐) 중기에는 안진경(顔眞卿) 이 원세(圓勢)를 가미하여
    새로운 서풍을(書風) 이루었다. ​현재까지도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서체(書體)이다.

    해서(楷書)는 크게 북위해(北魏楷) 또는 위해(魏體) 와 당해(唐楷)로 분류다.

    [위해(魏楷)]
    예서(隸書)에서 벗어나려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형태가 여러 가지로 변하였고, 석각(石刻),
    마애(摩崖), 조상(造像) 등에 주로 새겨 강하고「精强」 수수하며「質朴」 차갑고
    험하면서「寒險」있다. 이것을 북비체(北碑體)라 고도한다. ​​

    ​방필(方筆) : 용문석굴조상기(龍門石窟造像記), 장맹룡비(張猛龍碑), 고정비(高貞碑)
    ​원필(圓筆) : 정희비(鄭羲碑), 운봉산(雲峯山)의 제각(諸刻)이 전해진다.

    - 기본 점획의 특징 -
    •​일점일획(一點一畵)이 독립됐다.​ •​용필(用筆)이 단정하고 흘리지 아니 함.
    •행필은 신속하며 점획은 날카롭다.​ •전절(轉折)은 측봉(側鋒)을 이룬다.
    •획의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모나있다. •갈고리와 파임은 힘이있다.
    •종횡이 기울고 착란되어 있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서예(書藝)를 배우면서 가장 많이 쓰는 해서 서체가 북위체(北魏體)일 것이다.

    [당해(唐楷)]
    북위에서 수(隋) 나라를 거쳐 수대에는 아직 획필 이 다소 예서의 모습이 보이며
    당대에 이르러 서체가 전형(典型)을 이룬 해서로 완성된다.

    초당(初唐):우세남『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구양순『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저수량『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중당(中唐):안진경『안근례비(顔勤禮碑)』,『가묘비(家廟碑)』등이 있다.

    ​- 기본 획의 특징 -
    ​ •​일점일획(一點一畵)이 독립됐다.•​용필(用筆)이 단정하고 흘리지 아니 함.
    •한일자는 마제잠두(馬蹄蠶頭) 형상을 이룬다.
    •세로로 퍼져있어 부드러운 형태를 가진다.(장방형)
    •가로획의 오른쪽이 올라간다.(右上勢) ​•장봉(藏鋒)의 필법(筆法)을 가진다.

    ♧우리가 서예를 배우면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쓰이는 해서의 서체는 북위체,
    구양순체, 안진경체라 할수있다. ​
    시대적분류로 위해(魏楷) 당해(唐楷)로 나눌수 있고 서체를 쓰고 발전시킨
    사람에의해서 도 분류를 많이 한다

    왕희지 (王羲之) 307~365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생존 당시에도 그의 서체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 값
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
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만이 전해지는데
서풍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가,
초서로는 《십칠첩(十七帖)》이 전해진다.
672년 당(唐) 고종의 명을 받아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는
그의 서풍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도 《순화각첩(淳化閣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유목첩(遊目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에 필체가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희지체 [王羲之體] (두산백과)
    왕희지 (王羲之)의 악의론 비문

    왕희지 (王羲之)의 초서 과연 예술의 경지로 이끈 글씨

    구양순 (歐陽詢) 557~641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
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
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
(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
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
(化度寺碑)》 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양순 [歐陽詢] (두산백과)

♧ 구양순의 서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자 한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양순체 [歐陽詢體] (두산백과)

♧ 구성궁예천명[ 九成宮醴泉銘 ]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성궁예천명 [九成宮醴泉銘] (두산백과)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 [九成宮醴泉銘] 비문 서체

    구양순 체의 연습

    안진경 (顔眞卿) 709~785
안진경은 당나라의 서예가로서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했는데,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한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
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
(均齊美)가 있어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
를 지배하였다.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 불리는
《제질문고(祭姪文稿)》 《고백부문고(告伯父文稿)》
《쟁좌위고(爭座位稿)》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고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당시
유행했던 진(晉)의 서예가 왕희지와 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서체를 본뜨지 않고 스스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된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으며, 명나라의 만력연간
(萬曆年間:1573∼1620)에는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진경체이다.
그의 글씨는 후대 중국의 명필 유공권(柳公權)·소동파(蘇東坡)·채경(蔡京)·동기창(董基昌)·
왕탁(王鐸)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한호(韓濩)·조광진(曺匡振)·
김돈희(金敦熙) 등이 특히 안진경체에 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진경체 [顔眞卿體] (두산백과)

중국 당대(唐代)의 관리, 달필가. 개원 22년(734) 26세로 진사에 급제한 이래 광덕 2년(764)
형부상서가 되어 노군개국공에 봉하여졌으므로 안로공이라 불림.
나중 재상 노기의 모함으로 제주(허난성) 용흥사에서 암살됨. 왕희지에게서 서적(書跡)을 배운
것으로 보이나, 난세를 정의와 충렬로 일관한 강직한 정신을 반영, 생명감 넘치는 독특한 서풍을
창조하여 화려한 왕희지풍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표작에는 『천복사 다보탑비』, 『동박삭화찬비』, 『마고선단비』, 『안씨가 묘비』 등 해서와
『제질문고』, 『세백문고』, 『쟁좌위첩』 등의 행초가 있다. 또한 문집에는 『안로공집』,
집첩(集帖)에는 『충의당첩』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진경 [顔眞卿, Yan Zhenqing]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좌로 부터 천복사 다보탑비 안근례비 등 안진경체 서체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조맹부는 호주(오늘의 절강성 오흥) 출신으로 자는
자앙, 호는 송설도인인데 조오흥, 조영록, 조문민
이라고도 한다.
다섯 살부터 서예를 습득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로부터
줄곧 몇 십년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한 후 서예를
익혔는데 날마다 적어서 몇 천자 많아서 몇 만자를
썼다고 한다.
그는 송(宋)나라 황족 출신이지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와 그 후 다섯 황제를 섬겼다. 특히 인종의
총애를 받고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가 되었다.
조맹부는 서화시문에 출중한 원나라 제일의 문인으로 그림은 산수, 화조, 죽석, 인마 등을 모두
잘 그렸다. 그는 당나라와 북송 화풍을 본뜬 복고주의를 주장하고 실천하면서 원나라시기 산수화
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조맹부는 서예에서 왕희지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왕희지
의 글씨를 열심히 배웠다. 그는 여행 중에 우연히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탁본을 얻어 배를
타고 가던 중 13일 동안 매일 그것을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난정13발"이다.
조맹부는 "난정13발"에서 "서예를 공부하는 데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하는데 첫 번째가 운필이요,
두 번째는 자형이다. 운필이 능숙하지 못하면 잘 써도 오히려 좋은 글씨가 못되고 자형이 묘하지
않으면 능숙하게 써도 오히려 어설프다.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를 바로 이해해야 비로소
글씨를 논할 수 있다."고 했다. 조맹부는 여러 서체에 모두 뛰어났으며 그의 서풍은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림에서 "작화추색도권"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은 중국 산수화 역사에서 이정비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현장에서 그린 것이 아니고 고향에 돌아온 후 친구 주밀과 함께 북방의 경관을
그려보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주요작품으로는 그림 "강촌어락도", 서예작품 "난정첩십삼발", "여중봉명본척독" 등이 있고 문집에
"송설재문집"이 있다.
ⓒ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운영팀

고려의 충선왕이 중국의 연경에 만권당을 세우고 고려의 신예 학자(이제현 등)들을 데려다 공부
시켰을 때, 이 때 중국 학자로써 만권당에 초대되어 학문을 가르친 사람이 조맹부였다.
이 때문에 신진학자들 사이에서 조맹부체는 삽시간에 유행하였고, 이는 조선 창업이후로 이어져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서체가 되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조선의 창업은 이들 신진학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기 때문에 조선에까지 그 여파가
이어진다. 또 이 조맹부체 (= 송설체, 조맹부의 서재 이름인 송설재에서 따온 명칭임)는 그 특징이
굳세고 정밀한 느낌을 주는 것이므로 조선전기 사회 건설의 분위기와도 잘 들어맞는 서체였다.
    좌측으로 조맹부체의 대가라는 안평대군과 문종의 글씨다. 강인하고 사나이다운 느낌이 든다.
    우측은 조맹부체의 서체

    박돌천(趵突泉) - 山東 濟南市 구성 서문밖에 있는 샘 그리고 조맹부의 박돌천 서체

    한 호 (韓 濩 ) 1543~ 1605
본관은 삼화. 자는 경홍, 호는 석봉·청사. 할아버지는
정랑 관(寬)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9년 천거로
사어가 되었으며 가평군수·흡곡현령·존숭도감서사관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왕세정(王世貞)·
주지번 등 중국인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월사집 月沙集〉의 〈석봉묘갈명 石峯墓碣銘〉에
의하면, "꿈에 왕희지(王羲之)로부터 글씨를 받아
마음속으로 자부하고 법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서 해서에서 초서에 이르기까지 그 묘함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중경지 中京志〉
에 의하면,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의 서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의 안본을
임모해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원첩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진당인의 높고
굳센 기운이 결핍되었다.
또 사자관으로 오랫동안 있어 틀에 맞추려는 듯한 글씨를 만들게 되어 서품이 낮고 격조와 운치
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을 다듬는 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글씨의 짜임새가 좋고 필력도 있어 일세를 풍미했고, 그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생길 정도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 阮堂集〉에서 "석봉첩은 매우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극히 속된
것도 있다"고 평했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 평양의 기자묘신비
등 많은 비문을 썼다. 〈석봉서법 石峯書法〉 1책과 〈석봉천자문 石峯千字文〉 등이 모간되었다.
출처:다음백과
    위창 오세창 구장품 (이백의 관산월) 아래좌 천자문 아래우 등왕가시서 (관송미술관소장)

    ♧ 우리나라 서체의 변천
    고려전기에는 통일신라에 뒤이어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모두 유행했다. 그 중 특히 구양순체
    가 유행했다.

    조선초기의 서체를 대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송설체이다.
    송설체는 원나라 말기의 학자였던 조맹부의 글씨체로 그의 서실(書室) 이름이 송설재(松雪齋)
    여서 이런 명칭이 생겨났다.
    조맹부는 송나라에서까지 성행하던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배격하고 왕희지의 글씨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던 사람이다. 안진경체는 풍만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는 필법이다.
    그렇다면 조맹부가 돌아가자던 왕희지체는 굳건하고 우아하며 마른 느낌을 주는 그런 글씨체
    였다. 아무튼 조맹부는 이러한 왕희지체를 본받아 굳세고, 아름다우며 결구가 정밀한 필법을
    구사했고 이 조맹부의 유명한 서체는 고려말 만권당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의 공식필체
    가 되어 한세대를 풍미하게 된다. (고려말 충선왕이 만권당을 개설했을 때 이곳에 조맹부를
    초빙해 학문적인 교류를 한 바 있다. 이 때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이 만권당에서 최신 유학인
    성리학과 더불어 조맹부체를 습득하여 왔다.) 이 필체가 특히 조선전기에 유행한 것은 이 서체가
    조선전기의 사회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필법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새로운 문물을 정비하려는 시점에서 강인하고 건강한 필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조맹부체를 가장 잘 쓴 사람은 역시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이다. 그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씨는
    몽유도원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맹부체를 줄여 "촉체"라고 불렀다.
    조체라고 부르지 못하고 촉체라고 부른 것은 "조"라는 것이 00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서체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우선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다. 송설체의 특징 중 하나인 균정미에만 힘을 쓴 결과, 유약하고 판에 박은 듯한 서법이
    계속되어 송설체는 그 매력을 잃고만 것이다.
    이러한 때에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서풍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의 유행 외에도, 명에서 유행하던 복고풍 역시 수입되어 왕희지 서법으로
    환원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전하던 왕희지의 서첩은 거의 모두가 가짜였다.
    (생각해 보라. 300년대의 글씨가 남아있을리 만무하다.) 가짜를 보고 연습을 하니 그 글씨는
    가짜일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 한호를 꼽을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연마하여
    능숙한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듯 떡 써는 어머니 밑에서 피나게 연습하여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글씨 연습만 했던 것이다. 서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격조다.
    이것은 김정희가 주장했던 바 학문이 밑받침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이른바 서권기라고 하는 것. 화원이 그린 능숙한 그림이 문인화가의 그림에 비해 낮게 평가
    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얼마 만큼의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느냐에 따라 서체는 그 품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석봉체는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석봉체가 일세를 풍미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이를 본받는 사람의 수가 많았고 일반
    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유명한 천자문도 석봉의 글자체이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 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진경문화의 영향에 따라 우리 고유의 필체가 등장한다. 이름하여 "동국진체". 소론 출신의 윤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필법이다.
    그리고 이 시기 또 유행하는 것이 안진경체. 정조는 안진경체를 좋아했다.
    정조의 글씨는 비후미라고 하는 두텁고 장중한 느낌의 서체를 보여주고 있다. 왕이 쓰니 모두들 따라썼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안진경 글씨를 집자해서 비석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였고
    측근의 신하들도 이 글씨를 즐겨 썼다.
    그리고 그 후, 결국 불세출의 천재가 나오게 된다. 바로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며 예술가였다. 24살의 약관의 나이에 청에 가 옹방강, 완원 등의 대학자를
    접견하는 자리에서도 꿀림이 없었던 조선이 나은 천재였다. 그는 이들의 고증학 뿐만아니라
    금석학에도 관심을 보여 이후 우리나라의 학계를 주도하며 금석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희가 가장 뛰어났던 분야는 역시 서예 분야일 것이다.
    그의 글씨체인 추사체는 고대의 서예가들의 장점과 전서체 등의 장점을 모두 종합하여 완성한
    그만의 독특한 글씨체였다.
    그의 서체는 강건하고 거칠것 없는 호쾌함을 보여준다. 오랜 기간 모진 풍파에 시달려 얻어낸
    기암괴석과 같은 글씨체이다. 실제로도 그는 오랜 제주도에서의 귀양 생활로 그인고의 세월을
    견더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후 그의 글씨를 따라 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망해가는 조선의
    공식서체가 되었다.

    김정희 (金正喜 ) 1786~ 1856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
(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3여 종에 이른다.
신라의 김생(金生)이래 우리나라에는 많은 서예가 가
있었으나 김정희만큼 커다란 업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조선 시대 말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서예가, 금석학자, 정치가, 실학자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1856년 경기도 과천에서 파란 많았던
일생을 마쳤다.
추사는 잉태된 지 24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리고 태어날 때는 용봉산의
초목이 시들고 우물물이 줄어들어 추사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용방강·완원 등의 대학자들을 만나 금석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는 구양순·미불·동기창 같은 명필들의 필법과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생동감과 고박(古朴)한 맛을 풍기며 자형의 변화가 무쌍하고 난초 그림에도 뛰어났다.
또한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을 판독하였으며 <금석과 안록>이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출처:다음백과
    그 유명한 세한도 그리고 추사체 글씨

    추사 선생은 "가슴 속에 오천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書品)이나

    화품(畵品)이나 다 일상의 한 격(格)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고서는 다 속된

    기술쟁이요 잡스런 경지일 뿐이다. " 라고 하였다 하니 나는 괜스리 서예입문을 하였나

'오정묵연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호와 작품  (0) 2016.05.08
해서 배우기  (0) 2016.04.28
오정묵연회 이야기   (0) 201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