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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송정으로 가는 추억마차

 

 
추억마차1회
글 : 박인기
 
 출발하며
 

    학창시절 꿈과 희망과 낭만의 상징 송정

 쉰 살을 넘어서서 불러 모으는 추억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그것은 값싼 감상이 아니다. 고단한 삶의 역정을 걸어 나온 인생 장년의 훈장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새삼 추억 저편으로 넘나들고 싶은 이 마음의 정회는 무엇일까. 보듬어 기리고 싶은 소중함이 이미 우리들 추억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운 얼굴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지없이 고단하였지만 열심히 살았던 우리들의 시절이 눈물처럼 내비치는 곳. 이곳 카페에 들리는 시간이면 늘 새록새록 옛 생각들이 묻어났다. 사람들은 세월을 그리워한다고 하지만 세월이야 원래 무심한 것. 그 세월을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로 세월은 늘 되살아난다. 누가 내 마음을 알리? 누가 우리의 시절을 알리? 누가 우리의 사춘기를 알리? 물어볼수록 외로워지는 심사와 더불어 우리는 옛 친구를 부른다. 추억은 늘 그런 모양새로 다가온다.

아! 그래, 그 60년대의 혹심한 가난,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헐벗은 소년들로 만났다. 너나없이 가난하여 굳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없었던 시절, 절대 궁핍의 세월이었지만 만나서 주고받았던 인정과 언어는 따스하고 풍성하게 남았다. 그 시절 그 정겨운 언어들이 40년 가까이 하늘을 떠돌다가, 전쟁터와도 같았던 우리들 일터를 떠돌다가, 그래도 소멸하지 않고,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 오래오래 잘 발효되고 있었다. 오늘 카페의 구석구석에서 그런 우리들 언어를 발견한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추풍령 내리벋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오르내리면서도 차창 너머 늘 마음의 눈길로 가 닿던 곳. 세월이 흘러 이제 모교는 앞뒤 좌우의 고층 건물들에 가리어 숨어 버렸다. 그래도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이데아로서의 모교는 여전히 우뚝하다. 교가 가사 대로 ‘삼한대처 김천고을 황악산 밑에, 우뚝 솟아 크나큰 집’으로 모교는 마음에 남아 있다.

이제 그 40년 전의 송설 공간을 추억마차로 찾아 가려고 한다. 이름조차도 60년대식 명칭으로 붙였다. ‘송정으로 가는 추억마차’를 출발시키고자 한다. 송정과 교실과 운동장에서 함께 공부하고 뛰었던 친구들의 표정과 마음을 지금 이 나이에 다시 헤아려 남기려 한다. 돌아보는 일만큼 속절없는 것도 없으리라.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에서 살아 있기에 필시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이다.

이제 추억의 정거장을 백 여 개쯤 마련해 두고, 이 추억마차는 출발하려고 한다. 동기생 카페를 만들어 노심초사 수고하는 친구들에게 늘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을까? 용서와 성원을 함께 바라며 어쨌든 추억마차는 출발한다.

 

※ 필자약력
박인기 교수는 김천중(29회) 김천고등학교(16회)로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 육 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석사/교육학박사(문학교육전공)학위를 받았 으며,
경력으로는 교육방송(EBS) 프로듀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 청주교육 대학교 교수로 재직 하였고, 현재는 경인교육대학교 교수(국어교육)로 재직중이다.
한국독서 학회 부회장, 한국언어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사서학회 상임이사, 한국 국어교육연 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EBS 교육FM(104.5 MHZ) "라 디오 화법여행"(매일 09:40-10:00/일요일 16:00-18:00)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고있고 , 현 중학교 국어교과서 (3학년 1학기)에 "문학독서와 사회문화의 만남" 이란 본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서로는 문학교육론, 국어교육학 개론, 문학교육과정의 구조와 이론 ,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공역), 삶과 글쓰기, 생각을 주물러야 논술을 정복 한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두산 동아), 고등학교 독서 교과서(법문사) 등이 있다.

 

 

송정으로 가는 추억마차는 중,고교 시절 추억를 회상하는 글로서 나와 관련된 3편이 있어 옮겨 보았습니다 (송정: 송설학원의 정원 같은곳으로 학창시절 꿈이 묻어 있는곳)

제18회
 우리 시대의 영웅들

  

 

 동경(憧憬)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청춘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동경의 반대 자리에 추억이 있다. 중년의 내리막길에서는 동경이 사라져 간다. 사라지는 동경의 자리에 추억이 들어 와 자리 잡는다. 동경과 추억은 그런 함수 관계를 지닌다. 그래서 젊은 날 동경이 많았던 사람들은 노년으로 가면서 추억의 질감을 더욱 현묘하게 가진다.

  동경은 영웅을 꿈꾸게 한다. 그 무렵 국가적 영웅도 있고, 세계적인 영웅도 있었다. 박정희 신화가 우리시대 대표급 영웅 신화이었다면, 세계 주니어미들급 권투 챔피언 김기수의 신화는 우리에게 구체적 열광으로 영웅을 맛보게 해 주던 일대 사건이었다. 산업화와 더불어 대중사회가 조금씩 형성되던 무렵이었지. 순진한 우리들은 현대판 ‘영웅 신화’에 속는 듯 매료되기도 하고, 스스로의 꿈을 위해 애써 영웅을 갈망하기도 하였다.


故 오재민 선배님

  그러나 지금 우리들 가슴에 정겨웁게 동반하는 영웅들은 그런 거창한 영웅들이 아니다. 오히려 송설 모교의 학창 생활 공간에서 선망과 기대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내 마음의 영웅’들이다. 지금 뇌리에 떠오르는 그들은 학창 시절을 함께 호흡했던 선배와 동기생들이다.

  축구는 학교를 대표하는 종목이었다. 그런지라 축구 영웅이 많았다. 중학교 때이었지. 시민체육대회에서 농고나 상고와의 축구시합에서 튼튼한 다리 근육으로 위력적 파이팅을 발휘했던 김광웅선배,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질풍노도처럼 달리던 오재민선배(두분 선배님 모두 애석하게도 타계했다), 지칠 줄 모르는 뚝심으로 투혼을 보여주던 서태범선배 등이 우리들의 작은 영웅이었다.

김천에 연식 야구 붐이 몰아쳤던 60년대 초반에 투수로 활약했던 박행남선배도 떠오른다. 내 개인적 감회로는 우리 동기중에서도 축구와 야구로 이름을 날리던 이장현, 박창효, 한시환, 이종명 친구들이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영웅 자리를 차지한다. 이 사실을 본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이장현 선수
박창효 선수
이종명 선수
  따지고 보면 영웅이란 내 열등의식의 반대쪽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구이다. 내 열등을 보완하는 좋은 역할을 해 주었다. 사실 ‘마음의 영웅’을 가지지 못한 소년 시절이란 불행하다. ‘마음의 영웅’을 가지지 못한 소년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건성으로 늙어버린 아이이거나, 아니면 짱짱한 오만으로 가득 차 있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문 희

 

  영웅 이야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런 장면도 생각난다.
  고등학교 시절, 해 저무는 9교시 늦은 보충수업 장면, 교실 뒷자리 책상 아래로 어지럽게 그러나 은밀하게 사진 몇 장이 나돈다. 그 무렵 인기 절정의 청춘 여배우로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문희, 고은아, 남정임의 사진이다. 사진을 가로채고 빼앗는 손길도 분주하다. 누군가 어렵사리 준비해 온 사진이다. ..... 결국은 윤현목선생님께 들켜서 풍비박산이 나고....

  트로이카 청춘 여배우들도 그때 우리에게는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정복하고 싶은 영웅 심리’를 자극하는 존재들이었을까.

  젊은 날이란 무언가 채우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우는 시절이다. 비우는 것은 마냥 쓸쓸하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름다움에도 각기 그 놓이는 자리가 있다. 동경으로 채우는 아름다움, 그리고 추억으로 비워 내는 아름다움. 그 둘이 지긋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구도. 그것이야말로 제법 그럴듯한 ‘인생의 그림’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밝은 햇살 부서지는 가을 뜨락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을 달려 지난날을 돌아보라. 마음 속 친숙했던 내 마음의 영웅들도 만날 수 있으리니, 그로 인하여, 아무도 모르게 느껴지는 은은한 향수(鄕愁)가 생겨난다면, 그 또한 작고 조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부탁컨대, 쓸쓸해하지 않기다.



제80회
 
 축구의 추억

 

 

 오늘, 2006년 6월 24일, 월드컵 축구의 열풍이 지구를 휩싸고 간다. 마치 그 열풍의 기운으로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16강 진출 좌절’이라는 결과적 사실(fact)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 국민적 붉은 열정의 꿈은 참으로 장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집단화 된 열정 에너지로 한국 축구를 환호하고 응원하던 한국인들의 그 붉은 마음이 눈물겹다. 이 눈물겨움의 정서를 다시 먼 훗날에 우리는 어떻게 추억할까. 이렇듯 마음 쓰린 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종의 위안은 추억이다. 아쉬움의 끝자락에 서서 옛날 송설 교정의 축구를 추억하기로 한다.

 


48회전국체전출전 선수들(右에 두번째 본인)

 1960년대 말 축구는 가히 송설학원의 핵심 스포츠이었다. 다른 운동부서가 시절 따라 여건 따라 부침(浮沈)이 있었어도, 축구부는 비교적 일관성 있게 운영이 되었다. 실력도 만만치 아니하여, 인근에서는 송설 축구부를 경계하지 아니하는 팀이 없었다. 특히 송설34회 무렵에는 전국체전 4강에 오르는 때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체전에 출전한 송설 축구부의 경기를 전교생이 라디오 중계로 듣기도 한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숙적으로는 대구·경북 차원에서는 성광고가 자주 등장하였고, 지역에서는 성의상고와 자주 결승에서 맞붙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전담 코치를 영입하여 무언가 앞선 기술을 익히기에 나름으로 열성을 다하였다. 송설 축구부는 주요 경기마다 결승이나 준결승에 진출하여, 우리들 기본 자존심을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축구 경기 응원하다가 승리 환호성에 목이 쉬어 귀가하던 날이 해마다 꽤 여러 번 있었다.

 


3년동기들 左로 부터 석훈,준태,순열,장현,장원

 그 때 운동장을 누비던 친구들! 친구가 선수로 뛰면 성원하는 마음이 곱절 늘어난다. 축구 선수 유니폼을 입고 학교 대표로 뛰던 그들! 선수는 승리의 환호를 끝없이 꿈꾸지만 현실은 늘 애환이 함께 한다. 훈련은 늘 혹독하고, 자신의 기량은 늘 주변의 평가 대상이다. 게다가 미래의 불확실성이 이중고로 다가오는 생활이다. 어찌 공부의 스트레스에 비하랴. 승리의 짧은 환희와 각고의 긴 고통이 그들 애환의 현주소이었음을 이제야 돌아보게 된다. 


 박창효 동문은 운동부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 ‘교실 학생’ 아닌, ‘마당 학생’의 고충을 이야기 한다. 오전 수업 마치기 무섭게 오후 내내 운동장에 나가 훈련에 임한다. 운동 때문에 버리게 되는 공부는 두고두고 불안한 미래의 짐이다. 엄한 기율은 일차적으로 극복해야 할 기본 환경이다. 그러나 그들 덕분으로 당시 우리는 송설 자존심을 경기장에서 만끽하였다. 그들 덕분으로 이제는 추억의 시합 장면들을 이렇듯 아련하게 반추한다.

 

 중학교 시절 축구 선수로 뛰었던 친구들 중에는 운동 재능이 있는 동기생들이 많았다. 부동의 센터 포드로 활약하던 석용구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량의 수문장 최석훈군, 담이 크고 투지가 강했던 최용수군, 바지런하게 뛰었던 박정식군, 시야가 넓고 볼 찬스에 강했던 김준태군, 든든한 뒷심으로 묵묵히 수비 기량을 보이던 편재원군, 몸이 빨랐던 김덕준군, 독한 근성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던 조진주군, 그 면면이 떠오른다. 그밖에도 축구부와 인연을 스치듯 맺고 간 친구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정치호군과 김의준군, 그리고 김동수군의 모습도 있었던 듯하고.

 

 

△ 이장현 동기
△ 이장원 동기
△ 권순열 동기

 고등학교 시절에는 과묵한 이미지로 믿음직한 수비를 보여주던 이장현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거룩함에 가까운(saint) 선수 이미지를 보여준다. 공수 연결에 기량을 보이던 미남 선수 이장원군은 판단력이 뛰어났다. 빠른 주력으로 순간 질주를 하며 왼쪽 터치라인으로 볼을 전광석화처럼 몰고 가던 한시환의 플레이는 일품이었다. 약간 어깨가 들려진 자세로 집요한 마크와 태클을 가하여 상대를 무디게 하던 권순열군의 투지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기 미처 다 떠올리지 못하는 모습들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선배 선수들의 모습도 어제처럼 선연하다. 아무런 개인적 인연이 없음에도 마음에 쌓인 이 친근감과 팬 의식은 세월이 가도 변치 않는다. 송설 28회의 우람찬 센터포드 김광웅 선수, 송설 29회의 날쌘돌이 윙(wing) 오재민 선수, 인물 좋고 늠름한 풀백 이재년 선수, 두뇌 명석한 홍종철 선수, 송설 30회에 오면, 송설 축구의 자존심을 이나라에 떨친 김재한 선수, 힘과 투지의 헤딩왕 서태범 선수, 철벽의 문 손문석 선수가 추억으로 남는다. 송설 31회의 기량 좋고 매너 좋은 이쁜이 이재호 선수, 정확한 패스와 경기 감각이 돋보이던 풀빽 곽후영 선수가 인상적이다.

 1969년 가을 어느 날,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축구 준결승전이 서울 중앙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다. 김천고등학교와 대진하는 상대는 서울의 축구 명문 경희고등학교! 나는 그날 대학 강의를 빼먹다시피 하고 모교 축구를 응원하러 경기장으로 치달렸다. 상대팀은 대규모 학생 동문 응원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한 줌밖에 안 되는 응원단이었다. 기죽지 않고 나는 응원석에서 열띤 목소리로 응원을 했다. 경기 중반에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코어는 지고 있었지만 준결승에 오른 후배들이 대견하고 대단했다. 비에 젖고, 송설 사랑의 마음으로 젖고, 결승 진출 좌절에 대한 아쉬움에 젖고, 돌아오는 길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 몇몇과 막걸리에 젖었다. 총체적으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오래 오래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제81회
 야구의 추억
 
 
 야구는 짧은 인연으로 송설 교정을 머물고 갔다. 야구의 시절은 너무도 짧았다. 1962년에서 1968년 정도에 이르는 시간에 송설 유니폼의 야구팀이 우리들 곁에 있었다. 시절이 너무 짧았기에, 야구의 추억은 아쉽다. 피울 듯 져버린 꽃송이 같은 추억이다. 그 추억은 어둠 속 섬광에 드러나는 슬픈 애인의 얼굴처럼 애잔하고 선명하다. 1960년대에 송설 문하(門下)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각별 그러하다.

 

 김세영 재단이사장이 대한 야구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1963년부터 전국중학 야구대회를 여러 해 송설 교정에 유치했다. 이 대회의 부침(浮沈)과 더불어 우리 야구부의 모습도 기복을 드러낸다. 출발부터 여건 미흡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전국대회를 송설 운동장에서 개최하면서 야구부 발전의 기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의욕을 가졌었다.

 당시 중학야구는 준경식야구(準硬式野球)였다. 연식야구(軟式野球)는 초등생들이 주로 하는 것으로 공이 딱딱하지 않아 위험성이 덜한 공으로 하는 야구이고. 준경식은 고무재질은 같으나 공의 속을 체워 좀더 딱딱한 공 인데 주로 중학생들이 하였고. 고등학교 이상이여야 지금프로에서 쓰고 있는 가죽재질의 공으로 경기를 하였다, 즉 공 소재의 밀도에 따라 연식 준경식 경식으로 분류하여 나이에 따라 신체에 맞는 공으로 야구를 하였다 . 지금은 리틀야구라 하여 초등생들도 프로가 쓰는 공(가죽으로 씌워 실밥이 있는공)으로 야구를 하지만...

 

 당시 야구 명문 중학들, 이를테면 선린중학교, 배문중학교, 인천 동산중학교, 경상중학교 등에 비하면, 우리 야구부는 실로 어려운 처지이었다. 기본 장비조차도 구하기 어려웠다. 최고의 선진 팀이었던 재일교포 야구팀이 모국 방문 순회 경기를 마치고, 1962년 8월 20일 야구기구 품목 55점을 송설 야구부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우리 야구부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협회장인 김세영 이사장의 영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야구부는 이덕수선생님이 맡으셨다. 왕년에 야구 경력이 있으셨단다. 수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특이한 억양으로 ‘고로!’라는 말을 자주 하셔서, 우리는 선생님께 ‘고로!’라는 별명을 붙여 드렸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은빛 테의 반짝이는 안경을 끼고, 손에 쥔 공을 배트로 쳐 날리며 선수들에게 수비 훈련을 시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내는 시선이 강렬하셨다. 생각하면 선생님인들 얼마나 애로가 많으셨을까.

 

 1963년 봄에 운동장 북서쪽 코너에 백네트를 마련하였다. 김천 바닥에서 전국을 상대할만한 선수를 고르기란 참으로 어렵다. 선수층이 두터워야 무얼 한다지만 선수층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초등학교 때 야구 재능을 보였던 친구들은 학교와 선생님께 순종하여 참여하였다. 선수 모으는 형편이 궁색하던 시절이었다. 마땅한 선수가 없으면, 학년과 나이를 바꾸어 억지춘향 격으로 팀을 구성해야만 했던 시절이다.

 

 선수 친구들이 있음으로 해서 야구의 추억은 빛난다. 축구 선수로 공로가 많았던 이장현군은 원래 야구 쪽에서 포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아마도 부친의 재능과 인품을 물려받은 듯하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학생 시절 일본 야구의 명성을 상징하는 고라꾸엥(甲子園) 출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기량과 매너가 훌륭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종명군은 센터로서 활약하였는데 몸이 빠른 만큼 판단력이 빠르고 시야를 인정받았다. 파이팅이 넘치면서도 원칙에 충실하고 무엇에나 열심이었다. 그가 사는 모습도 그러하다. 왼손잡이 투수로 활약하던 박창효군 또한 우리가 잊지 못할 선수이다. 큰 키와 체력 체격 조건이 뛰어났던 그는 늘 ‘미완의 대기’로 주목을 받았다. 너그러운 호인형의 마인드(mind)를 지닌 그가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겪은 선택과 배제의 시련들은 그의 인생에 약이 되었을까 짐이 되었을까.

 

 선배들의 활약상도 추억의 한 대목을 이룬다. 송설 30회의 인상적인 투수 박행남 피처, 변화구의 위력을 처음 내 눈으로 보게 했던 선수이다. 전국의 야구 강호들을 맞아, 큰 스코어 차이로 밀릴 때도, 안경알 너머 무표정하게 그 무거운 분위기를 감내해내던 모습은 승패를 넘어서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는다.
 손문석 포수는 축구에서는 수문장 활동을 하고 야구에서는 포수를 했다. 에러가 많은 중·고교 야구에서 포수는 전체를 리드하는 분위기 메이커이다. 굴하지 않고 파이팅을 외치던 눈이 부리부리하던 손문석선수를 떠올리게 된다.

△ 李德洙 선생님

 유격수를 보던 정성기 동문의 모습도 떠오른다. 포지션이 포지션이니만큼 어쩌다가 억울하게 놓치는 에러의 순간을 간절하게 아쉬워하던 표정은 인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70년대 한국 축구의 포스트 김재한 선수도 김천중학시절에는 야구선수이었다. 키가 큰 그는 일루수를 맡았는데, 다른 내야수가 악송구로 보내오는 볼을 긴 다리를 활짝 벌려 가까스로 잡아내며 만장의 박수를 받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놓치거나 빠트릴 때의 야유들도 아슴푸레 기억에 떠오른다. 그밖에 여기서 다 올리지 못하는 그 무렵 선수들의 추억들은 독자 여러분이 댓글로 올려주기 바란다.

 

△ 이 장 현
△ 이 종 명
△ 박 창 효

 이기고 진 무수한 게임들이 있겠지만, 그 무렵 우리 야구부는 시련의 승부들이 많았다. 1963년 5월 24일 송설 운동장에서 벌어진 전국대회(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길다. 제6회 문교부장관 배 쟁탈 대회 및 중학야구단 일본원정 선발대회)에서 김천중학은 배문중학과 첫 경기에서 붙었는데, 1:9로 패했다. 1964년 10월 23일 경북경식야구대회 도내 고등학교 야구대회에서 김천고등학교는 대구상고와 붙어서 3:5로 패하고, 이어 대구공고와 붙어서 3:9로 패했다. ‘졌지만 장래가 기대되는 팀’이라는 언론의 평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는 말이 있다. 제 삼자가 하기로는 쉬운 말이지만, 패배를 겪는 선수들은 그 냉혹함이 뼈에 저미어 든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오늘은 따뜻한 위안과 인간적 공감을 전하자. 그래 그때 당신들이 있어 송설 모교의 깃발이 어딘가 어느 하늘 아래 날릴 수 있었구나!

 끝으로 이종명군의 회고담 한 가지를 소개한다. 1964년 우리가 중3일 때, 대구지역 체전에서인가 김천중학 야구부는 대구 경상중과 붙어서 3:7로 진 적이 있다. 비록 스코어는 밀렸지만 경기 내용은 상당히 잘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와 싸웠던 이 경상중학교 야구선수들의 상당수가 뒷날 경북고등학교의 야구부 선수로 스카웃 된다. 


 잘 알다시피 경북고등학교는 1967년 이후 전국의 모든 고교야구를 여러 해 제패하는 이른바 무적 경북고 야구를 만들어 낸다. 이덕수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그 야구 경기에 대한 아쉬움을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토로했다는 이야기는 가슴에 울리게 남는다. 그 시대 우리의 고귀한 열정을 전설처럼 전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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