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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보은 선병국가옥


  
   ♧ 삼년산성 등산후 보은읍 식당에서 대추  
     한정식을 점심으로 계획하여 찾아 갔으나
     월요일이라 그런지 식당이 문을 닫았다  
     보은에 올때 삼년산성과 선병국 고가옥
     구경을 계획하였으니 그쪽으로 가서 점심
     먹을 식당을 찾기로 하고 간다  
     네비가 알려주는 되로 찾아 갑니다 
     도로 표지판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 찾아
     가니 복해가든이라 식당 간판이 있어 찾아 
     갑니다 
     식당 간판은 있는데 식당같은 건물은 안 
     보이고 대궐같은 기와집만 보인다         
     
  
   ▼ 솟을 대문앞에 선병우 고가에 대한 안내문이 있고 안으로 덜어 가봅니다  

  
   ▼ 여기가 선병우 고가의 사랑채가 식당 입니다 
     사랑채로 덜어 가봅니다  옛날 과객이 양반집 사랑채 방문하듯 덜어 갑니다  
     방문 위에는 宣德之家  덕을베푸는집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옆에는 완당 題 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죽로지실이란 글이 걸려있다 

  
   ▼ 추사고택의 사랑채에 걸러있는 죽로지실과 똑 같은    
     죽로지실이 여기에도 걸려 있다  
     죽로지실의 뜻은 차를 끓이는 죽로(대나무화로)가 
     있는 방이라는 뜻인데 이집의 주인장의 풍류를 알수 
     있는 대목 입니다    
  
   ▼ 버섯찌게 정식을 주문했습니다 반찬이 시골에서 먹는 가정식 같습니다   

  
   ♧ 보은선병국가옥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큰 개울을 
     이루는데, 개울 중간에 돌과 흙이 모여 
     삼각주를 이루니 배의 형국 같은 섬이 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 있으니 
     여기가 인근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이다. 
     또한 이웃의 영재들을 뽑아 사비를 들여 
     교육시킨 선각자의 집으로 소문난 선(宣)씨
     댁이다.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당대 제일의 목수
     들을 가려 뽑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이상형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 
     요긴하게 이용될 공간이 집안에 
     망라되도록  설계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른바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시험되던 때였다.
     그래서 재래식 한옥으로 질박하게 짓기
     보다는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해 본 것이다. 이 집은 그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특성 있게 지어졌으므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80년에 큰물이 져서 일대가 침수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 돌각담들이 무너져서 아늑하며 유현하던 분위기는 많이 
 흩어지게 되었다. 대문 맞은편에 돌각담을 두른 일곽이 있고 그 안에 여러 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6·25사변 이후 
 무너져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 선을 즐거움으로 삼던 99칸 고가, 선병국 가옥 *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길 10-2 선병국 가옥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이다. ‘위선최락(爲善最樂)’, 즉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가풍에 따라 관선정을 열고 전국의 인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이 배고픔을 몰랐다고 할 만큼 선을 베푼 따뜻한 집이다. 99칸 대궐이 들어선 곳은 서원계곡 끝자락 
 소나무가 우거진 자리다. 집터가 하회마을처럼 연  꽃이 물에 뜬 형국으로 연화부수형의 명당이다.
 점심을 먹었으니 고가를 둘러 봅니다 
  
   ▼ 이집 대문앞 소나무 숲에는 이집의 효열각이 있다  
     효열각은 선정훈의 조부모 선처흠(?~1921) 과 부인 경주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한 정문(旌門)
     으로 1892년(고종28)에 명정되고 1928년에 지은것이란 입간판이 있고    

  
   ▼ 효열각 옆으로 선조들의 공덕비가 있다 

  
   ▼ 관선정과 장독대  
      관선정 앞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다 8도 단지가 다 모여 있고 선씨 가문의 맛을
      내는 장을 담구는 것 같다 

  
   ◀ 관선정은 선처음의 손자인 선정훈
      (1878~1963) 이 건립한 서숙(書塾)으로 
      1950년대 초까지 전국각지 수백명의 
      젊은이 들에게 개인재산으로 음식
      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영남에서
      홍 치유 라는 좋은 선생을 모셔 가르쳤다 
      이곳에서 수학 한 이들이 1960년대70년대
      이후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후에 우리나라 금석문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을 비롯여 많은 인물을
      배출 하였다  한다 

  
   ▼ 솟을대문 
        

  
   ▼ 사랑채 

  
   ▼ 사랑채 대청위에는  ‘위선최락(爲善最樂)’, 
      즉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가훈이 걸려 있다 
  
   ▼ 사랑채 대문과 소나무   

  
   ▼ 행랑채와 안채  
     보성 선씨 가문은 대대로 전라남도 보성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현재 가옥의 주인인 
     선민혁(宣民赫) 씨의 증조부인 선영홍공(宣永鴻公) 대에 무역업으로 집안이 큰 부를
     이루었는데, 새로운 집터를 찾던 중 ‘섬에 집을 지으라'는 꿈을 꾸었다 한다. 
     꿈을 심상치 않게 여겨 섬과 같은 형상의 땅을 찾았고, 지금의 터에 새집을 올리게 되었다. 
     안채의 앞기둥은 둥그런 옹기둥이고 뒤편은 사각기둥으로 서로 달리 되어있어, 
     집의 앞뒤가 마치 서로 다른 집처럼 느껴진다. 각 공간은 너른 부지 곳곳에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다. 이렇듯 독특함을 간직한 선병국가옥은 13년에 걸쳐 지었기에 구한말의 
     혼재된 한옥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존 한옥의 전통 재료인 나무와 흙에 
     당시 새로이 등장한 시멘트와 벽돌을 도입, 신구 소재가 어우러지도록 했다. 
     당시의 주택 건축 경향을 재현하는 드문 건축 사료임과 동시에, 옛것과 새것이 오가던 
     구한말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선정되었다. 

  
   ▼ 안채 

  
   ▼ 행랑채 많은 사람이 묵어 갈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지금에도 민박체험이 가능 함   

  
   ▼ 사당  

  ◀ 안채 뒤쪽의 장독대와 종가의 반찬  
   ♧ 350년 씨간장이 가옥을 알리다
    선병국 가옥이 알려지게 된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맛이 계기
    였다. 
    선씨 집안의 350년 묵은 집안의 보물
    씨간장이 세간의 유명세를 탔고, 
    현재 종부인 김정옥 씨의 손을 거쳐 
    아당골(娥堂谷)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장을 유통하고 있다. 
    별채 너머로 전국 8도의 장독대 800개
    가 모여 장관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김 씨는 이곳에서 ‘장 담그기 체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국내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에게까지 호응이 높다. 
    사실 숙박 체험 역시 장 담그기 체험을 
    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방문하면서 가옥에서 머물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된 조상의 공간을 느껴보는 
    것 역시 방문객들에게 뜻깊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해 별채를 중심으로 몇몇 
    공간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손을 보았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큰 규모의 한옥에, 
    베풂의 가풍과 종부의 손맛까지 깃든 
    선병국 가옥. 이곳에서 선씨 가옥이 
    제공하는 다양한 경험과 고요한 한옥의 
    정취를 느껴봄도 나쁘지 않으리 
  
   ▼ 선병국 가옥의 위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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