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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덕수궁의 가을 그리고 정동길

 

 

 

 

 

 

 

 

 


  
   ♧ 올봄 서울 서촌으로 이사간 친구의 초청
     으로 서울구경을 잘 했는데 ... 
     가을이 가기전에 한번더 보자는 연락이 
     있어 지하철 시청역 1번 출구로 갑니다 
     아마 정동길을 걸어볼 생각이 였던 모양
     인데 대한문 안을 보니 덕수궁은 단풍
     이 절정이다  이왕이면 안으로 덜어가
     덕수궁 구경을 하자고 제안한다 
     나이 먹어 경로라면서 입장료가 없다
     좋은 나이다 일안해 뭐라하는 사람없지
     지하철, 고궁, 절, 무료지 정말 영원히 
     이대로면 좋겠는데 ... 
          
  
   ▼ 대한문안으로 덜어서니 단풍천지 이군요  덕수궁의 가을  핸드폰에 담아 봅니다    

  
   ◀ 덕수궁 안내도 
     
  
   ▼ 중화문    

  
   ▼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 노오랑 물감을 풀어 놓은것 같은 노랑천지 

  
   ▼ 광명문 
     * 광명문 - 이 문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무 8년(1904)에 큰불이 나서 타 버린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었다. 1938년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정동에 있던 홍천사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같이 옮겨 세웠다.  

  
   ▼ 분수와 중화전의 옆  

  
   ▼ 궁중유물전시관 덕수궁관리소로 현재 쓰이고 있다      

  
   ▼ 석조전과 분수 고목의 수양단풍  휘 널어진 풍경 

  
   ▼ 석조전 과 준명전 사이 
    * 석조전 - 대한제국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광무 4년(1900)에 착공하여 융희 3년(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 준명전과 단풍   

  
   ▼ 동양과 서양의 사이 이어지는 단풍  

  
   ▼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의 굴뚝과 단풍 

  
  ▼  팥배나무 열매 
      팥배나무란 이름부터 생각해본다. 열매는 팥을 닮았고, 꽃은 하얗게 피는 모습이 배나무 꽃을
      닮았다 하여 팥배나무라 부른다.  

  
   ▼ 덕수궁(포덕문) 뒷문으로 나갑니다  하늘도 온통 단풍 여기도 가을은 깊어 갑니다  

  
   ▼ 덕수궁길 (돌담길) 

  
   ▼ 정동 로타리  

  
   ▼ 정동 제일교회  
      1885년 10월 11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에 의하여 정동 사저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 정동극장 
      정동극장(貞洞劇場)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를 목적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다. 
      개관 당시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했다가, 1996년 과도기 운영체제인 사단법인체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재단법인으로 완전한 독립법인체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중명전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4년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었다.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후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2007년 2월에 덕수궁에 추가로 
      편입되었다. 2009년 10월 현재, 보수·복원 공사 중이다.  

  
   ▼ 정동길 중명전 덜어가는 골목길에   
      있고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로
      붐비고 있어 그 줄이 밖 골목길로  
      꼬리를 물고 10m씩 줄을 선다 
      추어탕은 지역마다 다 달라 어디에
      것이 진짜 추어탕이라 말할수 없다
      서울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울 추어탕 
      한번 먹어 본다 
      밥은 옛날 기름진 쌀밥의 전형으로 
      맛있다 반찬도 모두 깔끔하니 간이
      맞다 추어탕은 서울의 특색인가 
      요즘 많이 먹은 체인점의 맛은 아니고 
      이집만의 고유의 맛 인것 같다 
      그러나 아 맛 있다 의 정도는 아닌것
      같고 그런데로 괜찬습니다   
       

  
   ◀ 신아일보별관 [등록문화재 제402호]  
     1930년대 지상1층 지하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미국 기업가인  
     싱거 미싱회사 (Singer. Sewing -
     Machne  Company ) 한국지부 등으로 
     사용되다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
     되어 1975년 사세확장에 따라 3.4층을 
     증축하고 1980년 언론기관 통폐합으로 
     경향신문사에 흡수통합되기 전까지 
     신아일보 별관으로 역활수행 
     민간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채택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조 로 건축된 건물
     로 일방향슬라브(One-Way Joist Siab) 
     구조및 원형철근사용등 일제당시 건축
     기법 구조 등이 잘 남아 있어 근대건축
     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신군부 언론 통폐합조치로 폐간되어 
     언론 수난사 현장을 대변하는 등 
     근 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
          
  
   ▼ 이화여고 앞 정동길 

  
   ▼ 이화여고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에 의해 세워졌으며,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다.
      고종황제가 이화(梨花)라는 교명을 하사함. 이화, 즉 배나무 꽃이라는 이름은 학생들이 배꽃처럼 
      화사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 창덕여자중학교  

  
   ▼ 동네은 현대화 되였어도 고목(보호수)나무가 옛동네 임을 알려 주네요  

  
   ▼ 낙엽떨어진 정동길 운치가 있씁니다  조각품이 눈에 뛰어 찍었습니다   

  
   ▼ 천냥짜리가 어느새 이천냥으로 올랐군요   

  
   ▼ 그날의 스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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