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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옥천 용봉


◀ 강물의 앞 물결을 뒷물결이
밀어내듯이 세월도 세상만물이
흘러 흘러 갑니다
젊은시절엔 흐르는감을 잘 못
느껴 졌는데 ...
요즘에는 세상의 흐름이
왜 그리 빠른지 실감 합니다

오정서실에도 새로운 후학들이
덜어오고 그중 교직에 계시다
명예퇴직 하시고 오신분은
성격 좋으시고 기존회원과
잘 어울려 유대가 좋으시고 ...
내가 알고 있는 선생 출신의
이미지 와는 완전 다르고
시원시원 호탕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번 자리를
마련한다며 일반식당이
아니고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쐐면서 돼지고기라도
굽는다고 대전근교 월전리에
있는 자기 농장으로 초대한다

풍수를 모르는 문외한이 보기
에도 월전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려져 있는 분지로 서화천이
감돌아 흐르는 아늑한 곳
이라 느껴집니다
그리고 천년의 역사가 묻혀
있는 곳이군요
    ▼ 농장에서의 파티는 끝이나고 월전리를 한바퀴 돌아 봅니다

    여기 서화천이 감돌아 나가는 곳
    삼국사기(三國史記) 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서기 554년 금산(錦山)에서 출발한 성왕(聖王) 은
    보기병(步騎兵) 50명 을 거느리고 고리산(환산)에 주둔한 왕자(王子) 여창(餘昌: 훗날 백제 위덕왕
    威德王)을 위문하러 가는 밤 길,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매복병에 잡혀 김무력(金武力 김유신 장군
    조부) 휘하(麾下) 삼년산성(보은) 비장(裨將) 도도고간(都刀高干)의 칼에 죽었다.”라고 기술(記述)
    하고 있습니다.
    사학자(史學者)들은 '구천(拘川)'이 '구진'으로 변음(變音)된 것이고 '벼루'가 벼랑 즉 ‘절벽’을 뜻하니
    이곳 ‘구진벼루’가 성왕 사절지(死節地) 라고 합니다.

    ▼ 구진벼루 앞 서화천 방천에는 백제 성왕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 알고보니 이지역은 1500년전 신라와 백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전선이 였습니다
    백제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목슴을 잃은 것으로 관산성 전투에 대해 좀 알았 봤습니다

    위 지도에서 왼쪽 환산성 이백리성 등 △ 표시 산성은 백제진영 오른쪽 구건리성 서산성 삼성성 등 ○ 표시 산성은 신라진영
    ※ 관산성 전투
    관산성은 고리산성 또는 환산성이라고도 한다.(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지방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함산성(函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제 성왕은 538년에 서울을 웅진(熊津:충남 공주)에서 사비(泗沘:충남 부여)로 옮겨 안팎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에 힘써 중흥을 이루었다.
    내부의 안정을 꾀하고 힘을 기른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함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때 고구려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쉽게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 6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 10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 군사를 돌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고, 그곳에 신주
    (新州:경기 광주)를 설치했다.
    신라에 배신당한 백제는 보복을 위하여 대군을 동원했다. 554년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군사가 먼저 관산성을 공격하고 성왕은 뒤를 따랐다. 당시 관산성은 신라와 한강 하류지역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처음에는 대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가 우세했으나, 신라의 신주군주 김무력(金武力)의 비장(裨將)
    인 고간·도도(刀都)가 성왕을 급습하여 죽이자, 싸움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 4명과 병졸 2만 9,600명을 잃는 대패를 당했다. 120년 동안 계속된 나제
    동맹은 깨어지고, 백제는 멸망 때까지 신라와 적대관계에 있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보했고, 가야의 나머지 세력을 병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신라는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하고, 중국을 통해 직접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어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 서실에도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월전리를 방문하고 관산성 전투에 흥미를
느끼고 관산성을 한번 등산해 보자 라는
의견이 있어 찬성하고 관산성을 찾아본다
아직까지 뚜렸하게 어디가 관산성이란
결론은 없고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차용걸
교수는 관산성 위치에 대해 `신라·백제격전지
(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에서 관산성은 옥천읍
삼양리토성·서산성·삼성산성의 세 성터로 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삼성산(삼성산성)
용봉산(용봉산성) 을 등산 겸하여 답사에 나셨다
    ▼ 삼성산 산행 초입
    삼거리 토성 밑으로 경부 철도가 지나고(터널) 철길밑을 지나면 초입이 나온다

    ▼ 산길을 십여분 올랐나 전망대를 겸한 정자가 나온다 옥천시내가 다 조망 됩니다

    ▼ 여기가 삼성산 정상
    삼성산성터에 관한 안내문, 성(城) 표지석, 그리고 향토시인 정지용선생의 시비가 있군요



    ▼ 삼성산을 지나 318 봉을 지나 전망바위 에서 전망 합니다 용봉 멀리 마성산까지 전망 되고
    아래로는 옥천 시내가 한눈에 조망 됩니다


    ▼ 옥천시내를 당겨 봅니다 옥천도 많이 발전 했습니다 전형적인 시골의 읍이였는데 ...
    도시 냄세가 풍깁니다

    ▼ 여기가 용봉 입니다 용봉표지석과 용봉산성표지석이 나란희 있군요
    오늘 목적지이니 기념 찰영 합니다 고봉선생 대둔선생과 ...

    ▼ 용봉산성에서 내려본 월전리

    ▼ 삼성산성 용봉산성 마성산성 신라산성과 마주하는 식장산 산성 산을 두고 대치하는 DMZ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군요 그 옛날 성왕이 내려보이는 저길로 왔다니 움직임을 여기에서 다
    관찰되였겠습니다

    ▼ 내려오는 길에서 본 6월의 꽃들

▼ 여기는 삼양리 서냥당 용봉에서
내려 왔습니다
거리는 약3km로 길지 않았지만 3번의
오르내림이 심하여 약 2시간 30분 빡신
산행이 였습니다
옥천을 수 없이 지나 다녀도 몰랐었는데
월전리 농장을 방문한 기회로 천년의
비밀을 알아 낸것 같습니다
기회 있으면 환산도 가보고 당시 관련
있는 산성과 전쟁터를 찾아 보는 것도
좋은 역사 탐방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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